국내여행 정보

익산, 김제, 전주, 완주 아름다운 순례길

*바다향 2015. 6. 24. 19:00

전동성당



익산 미륵사지

익산 미륵사지. 지금은 허물어져 폐허가 된 자리에 새로 탑을 쌓았다.

새벽녘 연못이 탑을 오롯이 담고 고요하다.

 


나바위성당
나바위성당. 한옥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어우러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나바위성당
나바위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에 한지를 발랐다. 한지를 통해 스며나오는 빛이 영롱하고 그윽하다.

한 해가 저문다. 탈도 많았고 말도 많았던 한 해. 너무 깊은 상처가 남았던 한 해. 이 상처가 아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할 일.

치유하기 위해, 위로받기 위해 어디로든 떠나야 할 일. 그래서 걷기로 한다.


전북에 ‘아름다운 순례길’이 있다.


불교,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 민족종교가 함께 손잡고 상생과 화합을 위해 만든 길이다.

전북 지역의 다양한 종교 문화 및 역사 문화 자원을 연결한다.

익산, 김제, 전주, 완주 등 4개 시군의 경계를 넘나들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 길은 나바위성당과 미륵산

금산사를 지나고 모악산을 돌아 한옥마을과 송광사까지 이어진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 못지않게 종교마다 품은 곡진하고 진실한 이야깃거리가 스며 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의 찬란한 이상에 가끔 눈이 부시기도 한다.

순례길은 모두 9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짧은 구간이 14킬로미터, 긴 구간은 27.5킬로미터에 이른다.

코스마다 걷는 데는 4시간에서 8시간 정도가 걸린다.


총연장 240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장대한 길은 전주한옥마을 한국순례문화연구원에서 시작해 실타래

처럼 이어지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순례를 작정하고 오는 이들도 있어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 이 길을 모두 걷기도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듯하다.

마음이 가는 코스를 골라 슬렁슬렁 걸으면 된다.

구간마다 시작점과 끝점이 있지만 여기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구간을 구분한 것은 접근의 편의를 위한 것.

길 위에 자유롭게 들었다 자유롭게 빠져나오면 된다.
 

 

천호성지 부활성당

천호성지 부활성당. 백지사 터에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여기로 가져왔다.

 

백지사 터

백지사 터. 천주교 신자들을 눕혀놓고 얼굴에 적신 한지를 올려 질식사시켰다.

당시의 권력층이 천주교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폐사지를 서성이며 미륵불을 기다리며

먼저 익산. 천호-나바위, 나바위-미륵사지, 미륵사지-초남이 구간 등 3, 4, 5구간이 익산을 지난다.

첫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머물렀던 나바위성지, 초기 백제 불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미륵사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10여 명의 순교자가 묻힌 천호성지가 이곳에 있다. 


신동엽 시인이 그의 시 <금강>에서 “마한과 백제의 꽃밭”이라고 노래했던 익산.

그 익산은 한때 미륵 세상을 꿈꿨다.

굶주림도 없고 도적도 없는 세상, 온통 자비로 가득 찬 세상.

하지만 그 세상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그 염원은 미륵사지의 황량한 공간처럼 덧없기만 할 뿐이다.

 

익산시 금마면 한가운데 솟은 미륵산. 그 산자락 아래에 미륵사가 앉았다.

폐사됐으니 엄밀히 말해 미륵사지다. 새벽의 광활한 절터는 넓고 황량하다.

그 터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적막과 고요.

새롭게 솟은 탑은 우뚝하면서도 어색하고 옛 탑은 흔적으로 도처에 흩어져 있다. 

신라 땅으로 가 섬섬옥수 선화공주를 데려왔던 사내 무왕은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점에 이 절을 지었다.

동양에서 가장 컸다는 이 절을 세우며 그는 어떤 염원을 담았던 것일까.

시인 신동엽은 시 <금강>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선화는 미륵산 아래 산책하다 미륵불을 캤다. 땅에서 머리만 내놓은 미륵부처님의 돌,

마동왕의 손가락 이끌고 다시 가보았다. 안개. 비단 무지개, 백성들이 모여 합장, 묵념. 그들은 35년의

세월 머리에 돌 이고 염불 외며 농한기 3만 평의 땅에 미륵사, 미륵탑 세웠다.”
 

백제의 고결한 웅지를 집약한 이 절을 두고 훗날의 역사는 ‘동양 최대 최고’라는 수식어로 치장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전각 탑 회랑을 각각 3개씩 세우고 그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고 적혀 있는데,

2000개가 넘는 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 양식으로 쌓은 최초의 석탑이었고 우리나라

에서 가장 컸다.

조선 중기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미륵사 탑이 매우 크고 동방 석탑 중

최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륵사는 새로운 미래불로서의 미륵이 상주하는 공간이었고, 기울어져가는 백제를 구하려던 백성들의

바람이었다.

순례길의 새벽, 무작정 찾아든 미륵사지 석탑. 하지만 탑은 11년째 복원 중이다.

미륵사지에서는 지금까지 2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고려와 조선의 기록이 새겨진 명문 기와까지

나온 것으로 봐서는 미륵사가 조선시대까지 사찰로 기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익산은 경주와 공주, 부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고도다.

특별법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왕궁, 왕릉, 사찰, 산성이라는 고도의 4대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뜻.

왕궁이 들어섰던 자리는 왕궁면 왕궁리에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무왕은 그의 땅에 궁을 짓고 정사를 폈다.

백제 왕궁은 나라가 쇠락하고 언제부턴가 절집으로 쓰임새가 바뀌었다.

그리고 탑이 들어섰는데, 이것이 왕궁리오층석탑이다.

이 탑을 올린 시기도 백제 때인지, 통일신라 때인지, 고려 때인지 명확하지 않다.

유적 발굴은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이다. 

 

금산교회

금산교회는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ㄱ’자형으로 만든 것도

이채롭다. 지금도 당시에 만들어진 종탑이 서서 맑고 긴 소리를 낸다.

 

금산사

금산사는 김제를 대표하는 고찰이다.

겨울 산사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차분해진다.

 

천주교, 그 첫발자국을 더듬다

익산에는 천주교 성지도 있다.

가장 먼저 꼽을 만한 곳으로는 화산천주교회. 나바위성지 혹은 나바위성당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나바위라는 이름은 화산 끝자락에 위치한 너른 바위에서 유래했다. 

나바위성당은 건축 양식이 독특하다. 정면에서 보면 벽돌로 지은 영락없는 서양식 교회다.

수직으로 솟은 첨탑을 기준으로 아치형 입구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건물 옆으로 돌아가 측면을 보면 건물의 모양이 바뀐다.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올렸다. 처마 아래로는 툇마루를 개조해 만든 회랑이 이어진다.

뒤쪽에서 보면 엄연한 팔작지붕의 한옥 건물이다.

1906년 처음 지어질 당시, 나바위성당은 흙벽과 마룻바닥, 기와지붕과 나무로 만든 종탑이 있는 순

한옥 목조 건물이었다.

그러다 1916년까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한옥과 양옥의 형태가 뒤섞였고 이 독특한 양식 때문에 지난

1987년 7월 국가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110여 년 전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 건물 안에는 남녀가 따로 앉던 의자와 청나라 건설 기술자들이

와서 남긴 팔각 창문 등이 남아 있다.

본당 옆의 사제관도 벽돌조에 한식 기와다. 성당 안에도 초기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공간을 가르는 8개의 목조 기둥은 남녀유별의 관습을 지키기 위한 것.

오른쪽 소 제대의 감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목뼈)가 봉안되어 있다.

창도 이채롭다.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한지의 수묵 그림을 댔다.

성당 분위기가 한층 그윽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바위성당은 외양도 외양이지만 성당이 이 자리에 들어선 의미가 걸음을 더 붙잡는다.

1845년 10월 12일 밤 8시, 금강의 물길을 타고 낯선 배 한 척이 들어선다. 중국에서 출발한 라파엘호다.

배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신부,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조선인 신자 11명과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은 황산포 포졸들의 눈을 피해 화산의 나바위에 상륙한다.

11개월 후인 1846년 9월 김대건 신부는 참수되었고, 1897년 화산 아래 나바위 부락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김대건 신부가 우리 땅에 찍은 첫발자국, 그 위에 나바위성당이 세워진 것이다.

나바위성당에서 멀지 않은 성당면 두동리에는 1929년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두동교회가 있다.

한옥으로 지어진 ‘ㄱ’자형 교회로, 한쪽은 남자들이 앉고 다른 한쪽은 여자들이 앉는 자리인데, 남녀

회중석을 직각으로 배치하고 가운데에는 커튼을 쳐 서로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증산법종교 건물
익산은 증산도가 시작된 곳이다.
증산법종교 건물. 
 
고기마을 편백나무 숲.
고기마을 편백나무 숲.
길을 걷다보면 상쾌한 숲 향이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준다.

내 속에 어떤 마음이 있나

익산과 맞닿은 김제 역시 만만치 않은 유적을 품고 있다.

금산사에서 수류산방, 모악산을 에두르며 7구간과 8구간이 지난다.

약 30킬로미터 남짓한 코스의 절정은 금산사다.

어머니가 아기를 애틋하게 품은 산형이라는 뜻의 모악산, 그 한복판에 자리한 절이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우리 종교사에 우뚝한 대선사며 신부들, 민족종교의 창시자들과 조우할 수 있다.

그 흔적을 일일이 살피고 걷다보면 어느새 해가 뉘엿이 기운다.

금산사로 향하는 숲길에 성큼 들어섰다.

이 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금산사에 닿는다.

몇 걸음만에 풍경은 바뀐다. 선원까지 오솔길이 이어진다.

갈참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진 새소리가 발등에 톡톡 내려앉는다.

옹이 졌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절은 599년(백제 법왕 1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는 하나 확실치는 않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인 76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다고 한다.

진표율사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56억 7000만 년이 흐른 뒤 미륵이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하생신앙을 설파했다.

이후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그래서 금산사에는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은 크다.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안쪽은 트여 있다.

법당 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미륵 불상은 11.82미터, 좌우 불상은 8.8미터나 된다.

옥내 입불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통층이라 이렇게 큰 부처님을 모실 수 있다.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통일신라 말기 새로운 세상을 계획했던 견훤은 미륵불의 도움이 필요했고, 금산사에 정성을

많이 들였다.

하지만 맏아들 신검과 둘째 아들 양검이 일으킨 쿠데타 때 그는 미륵전 지하에 갇히게 된다. 

고려시대 때는 88당 711칸의 대사찰이었지만 정유재란 때 거의 불타버린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구국 3화상’이라 불리는 처영대사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켜 활동했는데 왜군이 복수 차원에서 절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지금 금산사에서 보는 목조 건축물들은 거의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다.

승병을 훈련시켰던 곳인지 마당이 유난히 넓다. 

금산교회도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1908년에 지어진 한옥 교회다.

두동교회와 마찬가지로 ‘ㄱ’자형으로 건축됐다.

교회 안,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100년이 넘은 풍금과 천장의 낡은 서까래가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들려준다.

금산교회에는 지역의 부호였던 조덕삼과 그의 충실한 머슴이자 마부였던 이자익의 이야기가 전한다.

주인과 머슴은 선교사의 전도로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신실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둘은 함께 장로에 입후보했는데, 놀랍게도 교회 설립자이자 일대의

거부였던 조덕삼 대신 한낱 마부이자 열다섯 살이나 아래였던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됐다.

그런데 조덕삼은 머슴이 장로가 된 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자익에게 설교를 들었고 교회 일을 도왔다.

조덕삼은 후일 이자익을 평양으로 유학 보내 목사가 되게 했고 금산교회로 초빙해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다고 한다.

금산교회에서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동곡마을에선 증산교 교주인 강증산(1871?1909년)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증산이 1908년 열었다는 ‘동곡약방’은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의 자취다.

강증산의 외동딸 강순임(1904~59년)이 설립한 증산법종교 본부도 가까운데,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삼청전과 묘각인 영대靈臺가 우뚝하다.

이곳에서 원평천 둑길을 따라 6킬로미터를 더 가면 수류성당에 닿는다.

신부님과 스님이 지도하는 두메산골 어린이 축구팀 이야기를 그린 영화 <보리울의 여름> 배경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1800년대 초 전라도 지역은 조선 전역에서 박해받던 천주교 신도들의 피난처였다.


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완주의 배재본당이 박해를 피해 모악산 반대쪽 깊은 산중으로 옮겨

오면서 1889년 만들어져 1910년까지

교우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수류성당은 전주 전동성당보다도 5개월 앞서 지어졌을 만큼 전통을 자랑하지만 1950년 인민군과 빨치

산에 의해 전소돼고 말았다.

현재의 성당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본당 신자들이 구호물자를 직접 적립해 1959년 다시 지은 것이다.

작은 시골 마을의 성당 같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수류성당을 나와 전주 방면을 향해 가는 길에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의 공기마을을 지난다.

이 마을에는 10만 그루의 편백나무 숲이 자리한다.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심어진 편백나무 숲에서 잠시나마 마음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다.

그동안의 순례를 반추하며 잠시 머무는 것도 좋을 듯.
 

 

수류성당의 성모상.
수류성당의 성모상. 오랜 순례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듯 서 있다.

전동성당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전주 전동성당.

풍남문에서 참수당한 윤지충 등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한옥마을
순례길 전주 구간에서는 잠시 짬을 내 한옥마을도 걸어보자.

 

 

순례길을 걷다보면 많은 이들을 만난다.
등산복을 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 이들도 있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자국을 새길 때마다
그 발자국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이들도 있다.
길은 경탄할 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전주. 순례길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기도 한다.

시내에 자리한 풍남문은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인의 순교가 행해졌던 곳이다.

1791년 12월 8일, 당시 32세였던 윤지충은 풍남문 밖 형상에서 불효, 불충, 악덕 죄로 사형되면서

한국 천주교 사상 첫 순교자가 됐다.

고산 윤선도 후예로 매우 번성한 해남 윤씨 집안에서 태어난 윤지충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충남 금산에서 성장한다.

그런 그는 사촌 형제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고 가톨릭에 입교한 이후 3년간 스스로 교리를 공부해

친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1790년 청나라에 있던 구베아 주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윤지충은

집 안에 있던 신주神主를 태우고 천주교 교리를 지킨다.

이듬해 어머니 권씨(권상연의 고모)가 죽자 가톨릭 교리에 따라 제사 음식도, 신주도 없이 장례를 치렀다.

윤지충이 신주를 불사르고 위패를 폐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당시의 유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패륜이었다.

결국 관아로 붙잡혀온 그는 온갖 고초를 겪다 참수당한다.

그의 머리는 5일간 풍남문 앞에 효시되었는데 이것이 신해박해다.

윤지충의 순교 이후 한국 천주교는 본격적인 박해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최초의 순교지 위에 그들을 기리는 전동성당이 세워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가장 이국적인 풍경쯤으로 가볍게 치부하기엔 너무나 아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성당의 주춧돌은 순교자들의 선혈이 어린 풍남문 성벽에서 가져온 것으로 세웠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높고 때로는 춥고 힘겹다.

그래도 순례길을 걷는 이들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쩌면 이것이 순례이기에. 고되고 혹독한 시간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름다운 순례길 여행자를 위한 정보

 

아름다운 순례길

코스
‘아름다운 순례길’ 코스는 모두 9곳으로 나뉜다.


1코스는 한옥마을-송광사 26.1킬로미터,

2코스는 송광사-천호 27.1킬로미터, 3

코스는 천호-나바위 24.1킬로미터,

4코스는 나바위~미륵사지 23.6킬로미터,

5코스는 미륵사지-초남이 25.5킬로미터,

6코스는 초남이-금산사 25.9킬로미터,

7코스는 금산사-수류 14.5킬로미터,

8코스는 수류~모악산 21.2킬로미터,

9코스는 모악산-한옥마을 27.5킬로미터.

가는 법
순례길의 출발점이자 끝점인 전주한옥마을이 아무래도 가장 접근성이 좋다.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전주 IC로 나온다.

익산의 나바위성당과 두동교회를 지나 미륵사지로 이어지는 4코스는 나바위성당이 출발

지점이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나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익산IC로 나오면 된다.

금산사로 찾아갈 경우, 부산-통영대전고속도로-익산장수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를

빠져나온다.

전주향교
중국 7현과 동방 18현 등 50인의 유학 성인 위패를 모신 큰 규모의 향교다. 

온전히 보존된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한다.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애초 경기전 옆에 있었으나, 한 차례 외곽 이전한

뒤 1603년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향교 내에는 다섯 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향교 내 서문 앞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이나

된다.

 

 

성당포구마을

성당포구마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세곡을 관장하던 성당창이 있던 곳이다.

한때 쌀 600석을 실을 수 있는 배 60척 이상이 정박할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물안개와

낙조가 풍광을 이루는 한적한 강변 마을이다.

일몰이 특히 아름다운 곳. 익산시 성당면 성당로 762.
 

숙소
전주 쪽에는 한옥마을 곳곳에 있는 민박집을 추천한다. 한옥생활체험관(063-287-6300), 승광재

(063-283-0071, www.royalcity.or.kr),

동락원(063-287-2040, www.jkhanok.co.kr), 아세헌(063-287-1677, www.kiwahouse.co미터) 등에서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다.

익산에서는 익산비즈니스관광호텔(063-853-7171)과 그랜드관광호텔(063-843-7777), 왕궁온천모텔

(063-291-5000) 등이 깨끗하고 시설도 좋다. 

 

전주비빔밥

식사
전주와 익산 쪽에 먹을 만한 곳이 있다.

전주비빔밥은 성미당(063-284-0029)과 가족회관(063-284-2884)이 유명하다.

콩나물국밥은 삼백집(063-284-2227)과 전주왱이(063-287-6980) 등이 잘한다.

한정식은 전라회관(063-228-3033)이 알아준다. 코스가 아닌 한 상 차림이다.

14만원짜리 한 상을 주문하면 음식이 차려진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익산 황등면의 황등비빔밥은 익산의 맛으로 꼽히는 음식이다.

한때 우시장까지 있었다던 황등시장은 위세를 잃었지만, 비빔밥집은 성업 중이다.

황등비빔밥은 밥을 살짝 비벼 고기 국물에 토렴한 뒤 그릇을 데워 수분을 말리고 육회를 얹어

내는 게 특징이다.

한일식당(063-856-4471), 진미식당(063-856-4422), 시장비빔밥(063-858-6051)이 맛집으로 꼽힌다.

기본 찬과 더불어 선짓국을 곁들인다.

칼칼한 콩나물국밥을 내는 별미집(063-843-2131)도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부활성당

천호성지
익산의 여산면도 들러보자.

지금이야 쇠락한 작은 면 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 왕비를 잇달아 냈고, 목포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던 길목이기도 했다.

여산동헌 앞의 ‘백지사白紙死’는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도들을 포박해 눕힌 뒤 한지를 얼굴에 올려

놓고 그 위에 물을 뿌려 질식시켜 처형했던 곳이다.

모두 22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백지사 터는 그 시신들이 버려졌던 곳이다.

가까운 천호성지에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 

 

 

금산사 돌사람

금산사
금산사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한다. ‘휴식형’이라 다른 사찰의 프로그램에 비해 자유롭다.

예불과 공양 등 기본적인 일정에만 참여하면 된다. 금산사 종무소(054-548-4441)에 문의할 것.


<2014년 12월호>
글·사진 최갑수(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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