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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교동, 여기가 진짜 슬로시티다

*바다향 2010. 11. 1. 22:03

지도를 보았다.

해안선과 인접해 있는 섬을 관찰했다.

최북단에 교동도가 있다.

민통선이 있고, 산 너머에 바로 북한이다.


한동안 이곳에서 북한군 기죽이는 성탄절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밝혀졌었으며

일인당 경작지 넓이가 전국에서 가장 큰, 교동평야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70년대의 풍경이 그대로 살아있고 관광지가 없다는 점,

조선시대 왕족의 단골 유배지로 이용되었을만큼 깊숙한 곳이라는 점이 끌렸다.

이곳은 섬이지만 행정 지명은 강화군 교동면이다.

교동이라 부르는 게 옳지만 여기에서는 '교동도'라 하겠다.



 

가까운 어디라도 다녀와야 할텐데... 하다 생각해 낸 곳이 강화도다.

그러나 강화도는 너무 유명했다.

그렇다면 석모도? 거긴 더 유명해졌다.

충청 이남으로 가려니 귀경 피서객들과 섞일 것이 두렵다.

그러다 교동도를 생각해냈다.

육지와 거의 붙어있는 남한의 섬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그래서 산꼭대기에 오르면 북한이 한 눈에 보인다는 섬이다.

70년대 농촌 풍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빈티지 아일랜드.

그래, 좋은 선택이야,


다음날 아침 아홉시, 자유로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일산대교를 건너 김포로 건너가기 위함이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향하는 48번 지방도를 달린다. 길이 험하다.

도로가 불량한 게 아니라 공사 구간이 많아서 조심스러웠다.

교동도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강화대교를 지나 창후리 선착장까지 가야 한다.


예상 소요시간은 한 시간 남짓? 창우리 선착장에 도착하니 해병대 군복이 보이고,

빨간 모자를 쓴 주차안내원들, 그리고 아담한 대합실이 눈에 들어온다.

매표구에 가서 차종, 탑승인원을 불러준다.

편도 차 한 대에 두 사람의 편도 도선비가 2만600원이다. 왕복 4만1200원이다.

배에 오르기 전 해병대 요원이 승선확인서를 거두며 교동도에서 주의할 것들을 말해준다.

"(혹시 떠내려왔을 수도 있는) 목함지뢰가 위험하니 모래사장에 나가지 마십시오.

(모래 사장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안전하다.

만일 (비슷한 물건이라도) 발견 시 접근하지 말고 군부대에 신고한다).

철책 등 군사시설 사진 촬영은 안됩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따가운 여름햇볕이 해풍마저 잠들게 했다.

배에 올라 창후리 일대를 바라본다. 수리중인 어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작은 배들,

바다에서 불쑥 올라온 것 처럼 보이는 별립산 등등이 한가로운 어촌 풍경 그대로다.

자동차 입선이 끝나자 배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출발한다.

교동도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풍경을 갖고 살고 있을까?

① 새우깡 갈매기
이 동네 갈매기는 석모도 강화도 외포리 갈매기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 여객선이 떠나는 항구의 갈매기들은 새우깡의 고소한 맛을 잊지 못하는가보다.

배가 출발하고 사람들이 갑판에 나와 새우깡 봉지를 뜯자 수십마리의 갈매기들이

손가락을 향해 달려들어 새우깡만 착착 채간다.

그러나 갈매기들의 목적은 오로지 새우깡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놀라 뛰어오르는 물고기도 간간히 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녀석은 뱃고동 핀에 앉기도 하고, 하릴없이 교동도 근처까지 따라온 놈도 있다.

교동향교
화개산자락 끄트머리에 있는, 그냥 보기만 해도 심박수가 높아지는 풍경이다.

홍살문 앞에 하마비(말에서 내리는, 일종의 주차장)가 있고 들어가는 입구에서 보는 정문의

모습이 꽤 운치 있다.

향교 문은 자물쇠로 잠겨있다.

들어가려면 향교 왼쪽에 있는 관리소에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나 들어가더라도 건축물만 볼 수 있을 뿐, 실내를 볼 기회는 없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 1127년 중국에서 현유(賢儒_떠받들만한 유학자라는 뜻으로

실제 인물은 공자다)의 상을 들여와 이곳에 문묘를 세우고 화상을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1980년에 복원된 건물이다. 향교 왼쪽에는 시원한 약수터도 있다.

③ 최북단섬 교동도
얼마 전 TV 1박2일에서 이곳을 다녀간 뒤로 꽤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교동도.

섬의 북쪽에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이 있다.

그 휴전선 너머로는 북한의 황해도 연백군(북한 행정명으로는 황해남도 연안군과 배천군)이

마주보고 있다.

지역과 관련된 기록이 고구려 때부터 있었고, 교동이라는 이름이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때였으니 최소한 1500년이 된 유서깊은 마을이다.

교동도에 들어가기 전 인터넷을 통해 약간의 상식을 얻었으나 섬이 어촌이 아닌 농촌이라는

점이 일단 생경스럽다.

'그래도 섬인데, 선착장 일대에는 회집이 즐비할거야'라는 상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창후리를 떠난 지 15분 만에 도착한 교동 월선포는 말 그대로 선착장뿐이었다.

구멍가게 하나, 부동산사무실 하나 그리고 선착장 대합실 뿐.

그 흔한 여행안내지도 한 장 없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화장실 앞에 서있는 '교동면관광안내도'가 교동 더듬이의 전부다.

이것을 디지털카메라에 담아 팸플릿으로 재활용했다. '

교동면관광안내도'는 교동도의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교동평야, 화개산, 난정저수지,

나이가 천 살이 다 된 은행나무 등을 가볼만한 곳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찾아간 '유적지'는 소멸의 극단에 와 있는 '유물'들이었다.

래서 더 소중하기도 했다.

④ 교동평야
교동도는 섬 전체가 산과 논으로만 이뤄진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교동평야'가 '조성'된

것은 고려 때이다.

교동도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 등 세 곳의 높은 산이 아우르는 지세를 이루고 있다.

세 산 앞으로는 조수가 흘렀는데, 그 빠르기가 대단해서 배가 지나기 위험할 정도였고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먹고 살 길도 막막한 편이었으리라.

그래서 조수가 흐르는 부분에 간척 사업을 실시, 농경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뤄진 간척사업 덕분일까?

교동은 일인당 경작 면적이 전국에서 제일 넓은 곳이 되었다.

젊은이는 없고 노인만 남은 것 또한 우리 농촌의 전형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⑤ 읍내리 비석군
조선시대 때 교동 지역에 부임해서 선정을 펼쳤던 수군절도사삼도통어사 도호부사

목민관들의 영시불망비 등 총 39기의 비석이 이곳에 모여 있다.

예전에는 교동 곳곳에 흩어져있었는데,

1991년부터 강화군과 유림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뜻은 좋으나 비석군의 터가 너무 좁고 경관이 산만해서 유적으로서의 권위가 조금 떨어

진다는 생각을 했다. 교동향교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⑥ 화개사
교동향교 근처에 있는 아담한 절이다.

고려 때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학대사, 낙공선사, 지공선사 등 공력 높은 큰 스님들이 이곳에 와서 공부를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고려 때 목은 이색이 교동을 좋아했고, 교동에 오면 화개사에 머물며 수양도 하고 글도

썼다는 기록도 있다.

화개사 앞에는 빼어난 자태의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는데, 수령 200년이 된 보호수다.

화개사 주소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489-1

⑦ 교동읍성
향교 지역을 나오면 큰 길이 나오고, 그 길을 건너면 바다에 가까워진다.

교동읍성은 바로 그 길 건너 마을에 있다.

읍성이라 해서 규모가 꽤 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문루를 받히고 있었을

홍예만 남아있었다.

홍예의 높이가 약 6m라고 하니, 이정도 높이로 적군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

심도 들었다.

그러나 읍성의 기능이 꼭 전쟁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군영의 담장 노릇도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높이가 문제될 것도 없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축조되었다. 동, 남, 북 세 곳에 성문을 설치했으나

진으로 보이는 남문만 남아있다. 문루는 1921년에 무너졌다고 한다.

⑧ 남산포
교동읍성 근처에 있는 작은 항구다. 이곳에 서면 보이는 바다 건너 긴 섬이 석모도다.

남산포 언덕에는 사신상이 있어서 풍어제를 지냈다고 전해지며 조선 인조 7년, 한성의 방어

목적으로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 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다음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등

3도수군 통어영을 이곳에 설치했다고 전해진다.

수군의 훈련장이 있던 곳이라 훈련장 터와 정박선을 묶었던 개류석 1기가 남아있다.

⑨ 난정저수지와 고구저수지
간척사업으로 평야가 조성되었지만 농사를 짓기에는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만든 저수지가 난정저수지와 고구저수지다.

다른 지역 같았으면 저수지 부근에 많은 맛집들이 들어 섰을텐데, 교동의 저수지 부근에는

아예 없거나 한두 집만 있을 뿐이었다.

난정저수지는 갈대가, 고구저수지에는 연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연산군거적지
연산군은 자신이 평생 어머니로 여겼던 정현왕후가 친모가 아니었으며, 실제 어머니인

윤씨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안 뒤로 심히 흔들려 폭정을 일삼았다고 전해지지만,

상은 지금도 연구중이다.

권좌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31세의 나이에 죽었다.

훗날 조성된 표시석에는 위리안치라는 말이 새겨져있는데, 위리안치圍籬安置란 유배자의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에 울타리를 치거나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막아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다는 뜻이다.

화개산 등산로 초입 갈림길 근처에 있다. 올라가는 길부터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교동에서는 연산군 외에도 적지 않은 조선의 왕족이 유배 생활을 하다 죽거나 풀려났다.

광해군,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인조의 5남

숭선군, 철종의 사촌 이희(익평군) 등이 그들이다.

⑪ 무학리 은행나무
교동평야를 둘러보다 발견한 조상님이다.

나이가 910살이 넘은 이 은행나무는 키가 25m, 둘레가 7.5m에 이르는 위풍당당한 풍모를 지녔다.

나무 아래에는 예의 눈에 익숙한 평상이 놓여있었는데, 그곳에 누워 무성한 가지와 그 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그대로 누워 잠들고싶은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보호수다. 주소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무학리 542

⑫ 한증막
우리나라의 목욕 문화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화개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한증막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내에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불을 지펴 온도가 높아지면 재를 꺼낸 후 생솔가지를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내고 옆 개울에서 몸을 씻는, 오늘날의 찜질방과 같은 원리의 웰빙 시설이다.

이 한증막은 1970년대까지 사용했으나 지금은 유적으로만 관리되고 있다.

⑬ 교동초등학교
특별히 볼 것은 없지만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녔다 해서 들러보았다.

1906년 5월5일에 화개농업학교로 시작했고 1912년 교동공립학교로 변신하면서 본격적인

초등학교 체제로 들어갔다.

100명 남짓의 어린이들이 다니고 있다.

주소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대룡리 529

⑭ 대룡시장

교동도를 근대문화 관광지로 조성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다.

교동이 가장 교동다운 것은 70년대 농촌 풍경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마을과 논들일 것이다.

그러나 근대문화로서의 교동을 보여주는 근거는 역시 대룡시장이다.

교동에는 특별히 양철지붕이 많이 보였는데 대룡시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대룡시장 골목에는 '파마대학컷트과'라는 미용실, 교동이발관, 제일다방, 궁전다방, 민욱이네

(구멍가게), 교동떡방앗간, 동산약방, 대룡장의사 등 오래된 풍경들이 말없이 있었고, 유난히

제비가 많은 것도 특별한 장면이었다.

대룡시장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골목이 되었다고 한다.

시간의 보물창고 같은 낡음의 미학은 살아있지만, 결코 편안해 보이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교동도는 인천시에 의해 근대문화관광지로 개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근대문화가 어떻게 보존되고 복원되고 다듬어질지 궁금할 뿐이다.

■ 교동 교통편
승용차를 권한다.

교동도는 결코 작은 섬이 아니며 도보여행을 위한 별도의 안전도로가 개설되어있지도 않다.


강화대교 - 솔정삼거리 좌회전 - 창후리선착장 - 선박 - 교동 월선포
도선 요금 = 어른 750원, 어린이 350원, 승용차 1만2000원

[이영근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