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독락당은 조선 중기에 지어진 5백 년이 된 목조 건물이다.
'낡고 헤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둘 만큼 견고하고 멋이 듬뿍 담긴 고택이었다.
특히 이 고택의 백미는 계당에서 바라보는 풍경.
흐르는 개천을 내 정원인 것처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는 적적함마저 잊어버린다.
독락당(獨樂堂), '혼자 즐기겠다'라는 회재 선생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읽을 수 있겠다.
왠지 느낌이 좋은, 독락당
나무마다 가지마다 연두색 새순으로 몸단장이 한창이다.
여름의 청청하고 풍성한 나뭇잎보다 이런 연하고 뽀얀 새순에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느낀다.
독락당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마치 깊은 숲 속을 헤쳐 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과연 길이 나올까 싶지만 환한 빛 속 공간을 슝슝 통과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윽고 위풍당당한 독락당이 눈앞에 등장한다.
위엄이 느껴지는 솟을대문이지만 누구든 반겨줄 듯 활짝 열려 있다.
독락당은 안채와 사랑채, 별당 그리고 정자인 계정까지 각각의 공간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어 현대 건물과
비교해도 공간의 활용도가 높고 세련됐다.
서울시가 베를린과 자매결연을 맺으며 마르찬 공원에 선물한 '서울 정원'이 바로 독락당 계정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을 정도다.
후손들이 살고 있는 살림을 차린 공간을 찾다가 고택의 입체적이고 복잡한 구조에 잠시 길을 헤매고 말았다.
정만큼 고귀하고 소중한 전통은 없다.
독락당은 동방 5현의 한 분인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이 중종 27년(1532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41세에 낙향해 지은 집이다.
이후 이곳에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던 중 7년 만에 재등용돼 좌찬성 벼슬까지 올랐으나
을사사화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이후 유배생활 중에 일생을 마감했다.
독락당을 매우 아껴 유배지에서도 이 집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보물이 가득한 고택
독락당은 집 자체가 보물 제413호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또 독락당의 현판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선생의 글씨며, 옥산정사의 현판은 이황 선생의 친필이다.
계정에 걸린 편액(액자)은 한석봉 선생이 썼다고 전해 내려온다.
집 뒤편에는 회재 선생의 유물관이 따로 설치돼 있는데 총 2천5백 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 중 퇴계 선생의 글, 인종의 서신을 포함한 1백35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독락당은 국가 보물을 모아둔 박물관도 되는 셈이다.
이미 종손이 기거하는 곳에는 CCTV와 도난 방지 설비가 설치돼 있었다.
집안에서 관리하기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박물관에 기증해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도록 하면 저도 편할 테지만 반대하는 문중 어르신들이 계세요.
방범 시스템이 잘돼 있다고 해도 어디 한 번 외출하기가 쉽지 않아요. 시스템을 일일이 관리하고 또 관광객
들에게 유물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큰 책임감이 필요하거든요."
고택을 관리하는 어려움에 대해 하소연을 토로할지언정 그는 자신의 고택을 찾아와주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겁다고 한다.
지금은 잊혀져가는 조상의 예법을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종손의 마음이다.
그는 특히 어린아이들이 오면 예법의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절하는 법에 대한 강의를 한다.
"요즘 사람들은 일명 '머슴절'이라고 하는 고두배를 해요. 두 손을 벌려 바닥을 짚으며 하는 절이요.
이것은 복종의 의미를 담은 절이에요. 하인들이 주인을 섬길 때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신하가 임금에게
상서를 할 때 하는 절이에요. 절은 꼭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하세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철씨의 '절 강의'를 옮겨보자면,
손의 위치는 평상시에는 남자의 경우 왼손이 위로, 여자의 경우 오른손이 위로 가게 한다.
흉사(상례)일 때는 공수의 위치가 바뀌어 남자는 오른손을 위로, 여자는 왼손을 위로 하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절을 해야 한다.
남편의 옆에서 미소만 짓고 있던 김춘란씨는 올해 채취한 쑥으로 직접 만든 떡과 오미자차를 내왔다.
부부는 독락당에서 신혼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다. 한 번도 외지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운명에 이끌려 만난 부부
종가의 종손인 이해철씨는 총각 시절 여섯 번의 선에서 모두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1년에 수십 번의 제사를 모시고 어른들을 보필하는 고달픈 종부의 삶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일이다.
"제 부모님이 모두 단명 하셨어요. 아버지가 46세에 작고하셨죠.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종손에게
누가 쉽게 딸을 주시겠어요?
어느 날인가 중매쟁이를 앞세우고 대구로 선을 보러 갔어요. 저도 상대 여성의 외모나 성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냥 나오는 길에 그 이웃집에 살고 있던 지금의 아내를 봤어요. 제 눈에 예뻐 보여 당장
중매쟁이에게 '이 집 아가씨 좀 볼 수 있게 해달라'라고 졸랐죠."
김춘란씨의 아버지, 장인어른은 중매쟁이의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반겼다고 한다.
핏줄과 뼈대를 중요시했던 장인은 '종가'라서 결혼을 허락했으니 두 사람이 인연은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당사자인 김춘란씨도 종가 며느리라는 부담감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종가로 시집가라고 했을 때 별 거부감은 안 들었어요. 저희가 시골 집성촌에서
큰집으로 살았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건 이미 습관이 된 거죠. 어머니가 늘 '결혼할 때 집
안을 봐야 한다'라고 말씀했던 터라 그냥 운명에 이끌리듯 결혼을 했어요."
시부모님이 안 계신 터라 고된 시집살이는 없지 않았을까, 예상되지만 종부는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집안 어른들이 살고 계시는 동네 전체가 시집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저희가 딸 둘에 막내아들 하나를 뒀어요. 부부가 아무리 딸 둘로 만족한다고 해도 문중 할머니
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아들은 낳아야 한다'라고 설득을 가장한 강요를 하셨어요. 아들을 낳는다는
약도 지어오시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결국 '계속 시달리는 것보다 하나 더 낳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그녀는 막내아들을 낳았다.
집안에 대한 간섭이 어디 '아들 생산'뿐이었을까.
무던히도 세월을 견뎌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독락당의 안주인이 됐다.
사람 향기 가득한 이곳
이해철씨는 과거 위암 선고를 받고 대수술을 세 번 받았다. 현재 완치 상태지만 식이요법을 하고 있다.
아내의 손길이 없었다면 건강을 쉽게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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