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쌓는 목적은 대부분 방어와 경계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은 그러한 기능에 충실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완공된 수원 화성(華城)은 사정이 달랐다.
축성을 명한 정조는 화성에 자신의 이상과 염원을 투영하고자 했다.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는 세손이자 훗날 제22대 임금이 된 정조는 끔직이 아꼈다.
11살에 부친의 죽음을 목도했던 정조는 효성이 지극했다.
아버지를 사모하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수원 화성의 백미, 화홍문
↑ 수원 화성은 정조가 세운 계획도시다.
효성을 실천하고, 정치적 실험을 펼친 장소다.
사진의 화홍문은 홍예 7개가 있는 아름다운 문으로,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 수원 화성은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된 문화유산이다.
도심 한가운데 있어서 주변으로 주택과 상가가 보인다.
↑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양옆의 성곽이 끊어진 채 홀로 서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 수원 화성에는 다양한 군사 시설물이 지어졌다.
옹성은 성벽 외부를 둘러친 성곽이다.
이외에도 포루, 공심돈, 장대 등이 세워졌다.
↑ 수원 화성 화서루에서 화성장대로 향하는 길을
관광객이 오르고 있다. 화성을 한 바퀴 도는 데는 두세 시간이 걸린다.
↑수원 화성의 명물인 화성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화성열차는 팔달산 성신사에서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을 거쳐 연무대까지 간다. cityboy@yna.co.kr
↑수원 화성의 한가운데는 행궁이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할 때 머물던 곳이다. 대부분의 전각이 10여 년 전에 복원됐다. cityboy@yna.co.kr
↑ 수원화성박물관은 화성이 도시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알려주는 곳으로 답사하기 전 방문하면 좋다. 2층 건물 내부와 외부에 전시물이 있다.
(수원=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cityboy@yna.co.kr
위에서 보면 버들잎을 닮은 화성은 하루에 순례하기 적당하다.
순성(巡城)에 특별한 규칙은 없는데, 대개 북문인 장안문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장안문은 남쪽의 팔달문과 함께 화성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한양도성의 숭례문보다 규모가 더 크다.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바깥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둘렀다.
옹성 가운데 설치된 문에서 고개를 올리면 웅장함이 느껴진다.
장안문 양쪽에는 주위를 감시하고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장치인 적대(敵臺)가 있다.
밖에서 보면 세로로 길게 홈이 나 있어서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화성 답사는 장안문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하는 것이 좋다.
화성의 주산인 팔달산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서문인 화서문은 장안문에서 600m쯤 떨어져 있다.
두 문 사이에는 북서포루(北西砲樓)와 북포루(北鋪樓)가 있는데, 모두 군사 시설이다.
포루(砲樓)는 대포를 쏘는 공간이고, 성벽의 돌출된 부분에 세워진 포루(鋪樓)는 병사들이 몸을 숨긴 채
공격하는 곳이었다.
화성에는 포루(砲樓)와 포루(鋪樓)가 각각 5개씩 지어졌다.
팔달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화서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성문 밖이 황무지여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장안문보다 작고 소박하게 건설됐다.
화서문 근처에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건물은 오히려 바로 옆에 자리한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다.
'속이 비어 있는 돈대'라는 의미의 공심돈은 조선의 성곽 중 화성에만 있다.
3층 높이에 망루를 지어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용이했다.
화서문부터는 팔달산 등산이 시작된다.
하지만 한양도성의 북악산이나 인왕산만큼 힘들지는 않고, 낙산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다.
산정에는 수원 화성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화성장대가 버티고 있다.
2층 누각으로 행궁은 물론 수원 시가지가 발아래 펼쳐진다.
장대 뒤쪽의 팔각형 시설은 활을 발사하는 노대다.
화성장대에서 하산하다 보면 화성 유일의 갈림길이 나온다.
내리막을 택하면 팔달문으로 이어지고, 낮은 암문(暗門)을 통과하면 성벽이 양옆에 있는 길인 용도(甬道)가
뻗어 있다.
길지 않은 용도의 끝에는 누대인 화양루가 있다.
팔달문은 화성에서 가장 볼만한 건축물이지만, 좌우의 성벽이 끊어져 홀로 서 있다.
장안문과 흡사하나 원형이 보존돼 있어서 가치가 더욱 높다.
시끌벅적한 시장을 지나 동문인 창룡문 쪽으로 화성 순례를 계속하면 군사 시설이 잇따라 나타난다.
하지만 팔달문과 창룡문 사이에는 커다란 굴뚝 5개가 있는 봉화대인 봉돈 외에는 유다르게 다가오는
건물이 없다.
화성의 백미는 창룡문에서 장안문까지다. 시간이 없다면 이 구간만 걸어도 충분하다.
또 다른 공심돈인 동북공심돈,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된 너른 터에 자리한 연무대, 화성장대에 버금가는
경치를 선사하는 동북포루가 연이어 출현한다.
동북포루 아래에는 건축미와 조형미가 도드라지는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이 위치한다.
두 건물은 방어 시설이 아니라 풍광 좋은 곳에 만든 누정 같다.
특히 화홍문은 수원천이 흘러내리는 홍예 7개 위에 세워졌는데,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화성 순성을 갈무리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 화성 행궁과 수원화성박물관
문루와 누대, 성벽이 수원 화성의 전부는 아니다. 본래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행궁이다.
경복궁을 지키기 위해 한양도성을 쌓은 것과 같은 이치다.
화성 행궁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할 때 머무는 임시 숙소였다.
일렬로 난 문 세 개를 지나야 정당인 봉수당에 이르도록 설계됐는데, 봉수당은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붙인 이름이다.
화성 행궁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행궁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병원이 들어서면서 파괴됐다.
봉수당 북쪽의 낙남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졌다.
지금의 행궁은 10여 년 전에 복원된 것이다.
화성 행궁에서 광장을 지나면 왼쪽으로 2009년 개장한 수원화성박물관이 보인다.
1층은 기획전시실, 2층은 화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로 구획돼 있다.
1층에서 조선시대 화성의 모습을 축소한 모형을 보고 계단을 오르면, 화성축성실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화성성역의궤와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내린 명령서 등이 전시돼 있다.
화성문화실에는 정조가 마련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장면이 패널과 모형으로 설명돼 있고,
장용영 군사들이 사용한 무기가 진열돼 있다.
또 조선 후기 국왕이 행차할 때 내걸었던 커다란 황룡기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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