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은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에 찾아가기 제격이다.
지나온 길을 반추하고 새해를 준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여행지는 없다.
전국 282개 간이역마다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풍경은 그 여정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역 주변에 자리한 볼거리와 향토 별미는 덤이다.
◆ 고깃집으로 변한 진상역 대합실
현재 지자체의 간이역 재생 사업이 활발히 이뤄지는 곳은 강원도 춘천시다.
춘천시는 2010년 복선전철 개통으로 폐선이 된 옛 경춘선의 간이역들을 복원 중이다.
경강역, 백양리역, 강촌역 등을 복원하고 역 주변을 정비하는 관광자원화 사업을 2015년까지 진행한다.
1차로 남산면 강촌유원지에 위치한 옛 백양리역 역사 복원 사업이 지난 10월 시작됐다.
백양리역은 상·하행 철도 한가운데 역사가 위치한 형태로 북한강과 간이역의 정취가 어우러져 철도 폐선
이후에도 관광객과 사진 동호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한편 건축사적, 문화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간이역들은 등록문화재나 철도기념물로 지정됐다.
현재 등록문화재 간이역으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인 신촌역(제136호),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군산 임피역(제208호)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또 철도기념물 간이역으로는 지난 9월 지정·보존이 결정된 동해남부선 4개 역(동래역, 경주역, 불국사역,
포항역)이 대표적이다.
철도기념물로 지정된 동해남부선 4개 역은 일제강점기에 건립돼 동해남부선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해 왔
으나 복선전철 사업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역사로 대체돼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역사성이 재조명되고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보전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코레일도 폐지하지 않는
쪽으로 선회했다.
특히 경주역과 불국사역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임에도 조선시대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져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동해남부선의 종착역인 포항역도 1945년 준공 당시 역사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간이역들을 보면 역사 모습이 엇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나라 간이역의 상당수가 일제강점기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역사 조성 시 표준화를 추진했다.
정면에서 봤을 때 'ㅅ' 형태의 박공지붕을 중심으로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단층 역사가 길게 이어지는 형태다.
아담하고 단순한 구조여서 웅장하고 화려한 대도시 기차역이 주는 위압감을 느낄 수 없다.
전북 익산 춘포역(등록문화재 제210호)은 원형을 간직한 국내 역사 중 가장 오래됐다.
1914년에 건립돼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1996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이용객 감소로 2011년 폐쇄됐다.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 목조 구조로 간이역 역사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크고 작은 지붕 차양들이 어우러지며 절묘한 건축미를 보여준다.
관광지로, 문화재로 재조명되면서 전국의 간이역들은 숨통이 트였다.
사실 코레일은 수익성이 떨어지는 간이역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
경영 논리에 따라 이용객이 일정 기준 미만인 역은 폐쇄하는 게 당연지사다.
하지만 일부 간이역이 명소로 부상해 관광객을 불러 모으면서 코레일은 간이역 유지와 활용의 명분을 얻게 됐다.
코레일은 지난해 '간이역 위탁 운영을 위한 국민 제안 공모전'을 실시했다.
전국 40개 간이역을 지역 명소로 육성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받은 결과 대구 고모역을 문화센터와 갤러리가 있는
지역 문화 허브로 만들자는 안이 대상을 차지했다.
이밖에 경북 김천 직지사역에 세계 철도 미니박물관을 조성하고 불교 테마 성지로 육성한다는 조계종 직지사
제안이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것을 비롯해 총 11개 제안이 채택됐다.
간이역을 주역으로 삼은 기차여행 상품도 올해 3개나 탄생했다.
코레일이 봄에 선보인 중부내륙 순환열차(O-트레인)와 백두대간 협곡열차(V-트레인), 가을에 출범한 남도해양
관광열차(S-트레인)이다.
중부내륙 순환열차는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 등 3개 노선을 묶은 관광열차 상품으로 257㎞ 구간을 하루 4회 순환
운행한다.
또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중부내륙 순환열차의 일부 구간인 철암역과 분천역 사이 27.7㎞를 하루 3회 왕복 운행한다.
백두대간 협곡열차의 남쪽 기점인 분천역(경북 봉화)은 지난 5월 스위스 알프스 산간 마을 체르마트와의 자매결연
으로 화제를 모았다.
한국과 스위스 수교 50주년을 기념한 결연을 통해 분천역에는 스위스 샬레를 본뜬 목조 건물이 들어서고 스위스
기차역의 상징인 숫자 없는 시계가 설치됐다.
간이역의 변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慶全線)은 철도 여행객 사이에 '간이역 골든 코스'로 통한다.
경남 밀양 삼랑진역과 광주송정역 사이 289.5㎞를 잇는 철도로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이른바 낙후 지역이 많아 상당수 간이역들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다.
◆ 득량역 앞에는 타임머신이 있다!
득량역은 경전선 구간에서 볼거리가 가장 많은 역이다.
역사는 수년 전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어 옛 멋을 느낄 수는 없지만,
역사를 나서면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1970~1980년대 시골 마을의 전형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역 앞길에 '득량 추억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득량 추억의 거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역전이발관이다.
1970년대 중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공병학 씨가 인수해 문을 열었다.
1978년 4월 25일자 보성군수 직인이 찍힌 '이용업 개설 신고필증'이 이발관 중앙 벽면 상단에 걸려 있다.
신고필증에는 6대4 비율로 가르마를 탄 머리숱 풍성한 젊은 이발사의 명함판 사진이 부착돼 있다.
눈가에 두텁게 세월이 내려앉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사람과 요금 외에 이발관 내 시설과 도구는 개업 당시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항공기 좌석과 가죽 소파를 결합한 듯한 이발 의자, 흰색 타일을 붙인 세면대의 세숫대야와 플라스틱 바가지,
일부분 녹이 슨 이발 도구들이 코흘리개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다녔던 고향의 이발관를 떠올리게 한다.
득량역 앞길에는 역전이발관 이외에 꾸러기문구, 득량상회, 득량국민학교, 역전만화방 등이 자리해 있다.
그중 꾸러기문구는 1980년대 문방구를 재현해 놓은 공간이다.
당시 유행하던 장난감과 인기를 끌었던 만화영화 포스터들을 감상할 수 있다.
1984년 여름 개봉한 만화영화 '내 이름은 독고탁', 철인 28호 로봇 완구, 인기 만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종이 딱지를 보면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 신세대는 호기심 만발, 구세대는 감회에 젖어
경전선은 본래 전체 구간이 단선 철도에다 정차역이 많아 열차가 속도를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단선이기에 교행(交行)하려면 철로가 2개 이상인 역이나 신호장에서 마주 오는 열차를 기다려야 했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곡선 구간도 속도를 마음껏 높이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느림보 열차이다 보니 남해고속도로 등 영남과 호남을 잇는 고속도로가 등장하면서 승객이 급감했다.
정부는 지난 2003년부터 경전선 복선전철 사업을 진행 중이다.
2010년 12월 삼랑진~마산(42.2㎞), 2012년 12월 마산~진주(53.3㎞) 구간의 복선전철 사업이 완료됐다.
2015년 진주~광양(51.5㎞) 복선전철 사업이 마무리되면 경남 지역 경전선은 옛 모습을 완전히 잃게 된다.
마산~진주 복선전철 개통으로 예닐곱 개 간이역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지난 11월 중순 간이역의 원형이 남아 있는 경전선 구간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1930년 문을 연 남평역(전남 나주시 남평읍)이다.
곽재구 시인의 대표작 '사평역에서'의 배경지로 2006년 등록문화재 제299호로 지정됐다.
2011년 10월 무정차역이 됐지만 지난 9월 27일부터 남도해양 관광열차가 정차하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광주역에서 출발해 마산역으로 향하는 남도해양 관광열차가 매일 오전 8시 48분에 남평역에 도착해 15분간
정차한다.
철로변 대합실 출입구에 차양 지붕을 덧댄 목조 단층 구조로 역사 내부는 현재 다구(茶具) 전시장으로 이용된다.
남평역에 이어 들른 곳은 능주역이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위치한 역으로 영벽정(映碧亭)이 가깝다.
영벽정은 능주역을 나와 왼쪽 방향으로 걸으면 10분 이내에 닿는다.
지석강의 맑은 물에 투영된 연주산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에 지어진 2층 구조의 정자로 돌기둥 12개가
기와지붕의 목조 누각을 떠받치고 있다.
1988년 중수돼 고색창연함은 덜하지만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워낙 빼어나 명소로 이름이 났다.
능주역에서 순천 방향으로 약 25㎞ 남하하면 무배치 간이역인 전남 보성 명봉역이 나온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반면 역무원이 없다 보니 안전사고 가능성을 우려해서인지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코레일 전남본부장 명의의 경고판에는 건널목이 아닌 선로 무단 횡단 시 철도안전법 제48조에 따라 1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한다고 적혀 있다.
명봉역에선 무궁화호 이외에 남도해양 관광열차가 오전 9시 45분(마산 방향), 오후 8시 59분(광주 방향)에
각각 출발한다.
열차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명봉역 내 녹색문고에 비치된 책을 읽는 것도 좋다.
한국현대수필문학선집(총 7권)을 비롯해 국내외 소설과 만화 삼국지 등 읽을거리가 다양하다.
명봉역 이후 추억의 거리가 조성된 득량역을 지나면 한우 정육점과 식당이 운영되는 진상역,
두 대의 남도해양 관광열차가 교행하는 하동역,
디지털 열차 시각 안내판이 설치된 횡천역이 이어진다.
횡천면사무소 앞에 마침 오일장이 열렸는데, 규모가 너무 작아 장이라고 부르기에 멋쩍었다.
경전선 일부 역에선 카셰어링 서비스 유카(YOUCAR)를 이용할 수 있다.
광주송정역, 보성역, 득량역, 순천역, 하동역, 진주역, 마산역, 창원중앙역 등지에서 유카가 운영된다.
이용 요금은 차종에 따라 다르다.
1시간 기준으로 '레이'는 주중 4천100원/주말 5천100원, '프라이드'는 주중 4천800원/주말5천9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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