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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서리처지도록 아름다운 붉은 절벽

*바다향 2013. 11. 14. 14:23

↑ 조선 10경으로 불릴 정도로 화순적벽은 장엄하게 파노라마처럼 둘러 처진 모습은 가히 경건함을

불러 일으켜 주는데 손색이 없다.

현재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는 이서적벽(사진 뒤)과 보산적벽(사진 앞)의 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 동복호의 가을

 


↑ 망향정과 이서적벽

 


↑ 화순적벽가는길에 만난 시골농가의 가을

 


↑ 옹성산 아래 자리잡은 적벽과 동복호

 

 



 

 

 

이 중 만추의 늦가을 발길을 사로잡는 곳이 있다.

바로 적벽(赤壁)이다.

옹성산(해발 572.8m) 자락을 둘러친 절벽이다.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와 보산리, 창랑리 일대를 아우르는 붉은 절벽은 동복천 상류 창랑천을 따라

7㎞에 걸쳐 있다.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 등 4개의 적벽이 한 몸인 셈이다.

'적벽'이란 명칭은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현재 화순의 일부)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 선생이

소동파가 노래한 중국 양쯔(揚子)강의 적벽에 버금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

석천 임억령은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 했고 하서 김인후가 1500년대 적벽시를 지은 뒤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수많은 풍류 시인묵객들이 적벽에 들러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방랑벽을 멈추게 한 곳도 이 곳이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지은 때가 1080년대쯤 되니 김삿갓은 그로부터 약 780년 뒤에 화순 적벽의 아름다움에

반해 괴나리봇짐 풀고 앉아 짧은 시를 한 수 남긴다.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에 있고/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를 흐르는 구나…."

이때만 해도 김삿갓은 이곳에 뼈를 묻을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정처없이 떠돌던 김삿갓은 다시 화순을 찾아 13년간 머문 뒤 동복면 구암에서 생을 마친다.

화순 적벽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여럿 있다.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이자 개혁 정치가였던 조광조(1482~1519)는 화순에서 사약을 받기 전에 25일 동안

배를 타고 다니며 적벽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한을 달랬다고 한다.

화순엔 아직도 그가 사약을 받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뿐이 아니다. 근대에 들어서는 갈래야 갈 수 없는 수몰 실향민들의 사연이 서려있다.

1970~80년대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최고 높이 100m에 이르던 절벽이 절반 이상 수몰됐다.

4개의 적벽 중에서도 가장 비경이 뛰어난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은 아예 출입이 차단되었다.

이유는 이렇다. 동복댐이 가둔 물은 광주시민들이 마시는 물이다.

그래서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꽁꽁 묶여 버렸다.

들어가 보려면 광주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절차가 까다로워 정작 화순군민들은 제 땅인데도 가볼 생각을 않고 산단다.

그렇게 4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일 년에 딱 하루, 음력 시월 초하루 무렵에 문이 열린다.

주민들은 이날 고향 마을 기슭인 적벽 아래 모여 잔치를 열며 망향의 그리움을 달랜다.

최근 좋은 소식이 간간히 들려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광주시와 화순군, 이서면 번영회 등이 협의 중이란다.

일주일에 한두 차례 한정된 인원에 한해 제한적으로 탐방을 허용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조금은 자유롭게 가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린 지난 주말, 화순 적벽을 찾았다.

적벽로의 상수도사업본부 초소가 들머리다.

이곳에서 노루목적벽과 마주한 망향정까지는 4㎞ 거리다.

비포장 임도인 길은 운치 있다. 동복호를 내려다보면서 걷는다.

임도를 따라 한 2km 정도 가면 좌측으로 시야가 툭 터진 곳이 나온다.

저 멀리 노루목적벽의 숨 막힐 듯한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절로 탄성이 터진다.

적벽은 이름 그대로 붉은 때깔의 절벽. 하늘로 치솟듯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수직으로 솟아오른 절벽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런 정도의 풍경이니 '조선 10경'이라는 말이 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적벽 아래 동복호는 또 어떤가. 하늘빛을 머금은 물빛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노루목적벽 맞은편 보산적벽에 정자 망향정이 있다.

댐 건설 후 물에 잠긴 15개 마을의 실향민을 위해 세운 정자다.

망향정을 둘러친 돌담 위에 올랐다.

가파른 산자락을 이리저리 굽이치는 창랑천은 이곳저곳에 모래톱을 만들었다.

어떤 것은 꼭 자라 모양새다.

태초부터 하나였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수몰전 그 옛날 동복호에 배를 띄워 적벽의 비경을 둘러보던 옛사람들의 뱃놀이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하다.

적벽 하류 동복호 관리사무소 아래에는
만경대가 있다.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만경창파(萬頃蒼波)'에서 이름을 따왔다.

동복호 상류 창랑적벽과 물염적벽은 노루목적벽의 규모만 못하지만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다.

'물 좋은 곳'에는 으레 정자가 있기 마련.

창랑천 물줄기와 어우러진 적벽의 수려한 풍광을 따라 물염정, 송석정, 망미정, 망향정 등 4개의 정자가 있다.

강가의 기암괴석과 소나무에 둘러싸인 송석정은 최근에 지어졌지만 풍광이 기막히다.

망향정 아래에 터를 잡은 망미정은 인조 14년 의병을 일으켰던 유학자 정지준이 1646년에 정자를 짓고 은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루목적벽 상류 3㎞ 지점에 자리 잡은 물염정은 김삿갓이 수시로 올라 시문을 즐겼다는 그 정자다.

돌아서는 길, 노산 이은상이 화순 적벽을 '선계(仙界)'에 비유한 시가 떠오른다.
'산태극 수태극 밀고 당기며/유리궁 수정궁 눈이 부신데/오색이 떠오르는 적벽 강물에/옷 빠는 저 새아씨

선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