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최보식이 만난 사람] "이들을 몰아낸 '죄책감' 있으나… 우리도 공장서 호의호식하며 보내진 않아"

*바다향 2013. 1. 14. 13:35

23명이 자살했다는 '쌍용차 사태'의 진실… 김규한 쌍용차 노조위원장
"투자만 해주면 내 임기 동안 절대 파업하지 않겠다 대신 고용을 보장해달라"
전체 직원의 3할에게 해고통보 77일간의 옥쇄(玉碎) 파업…

동료끼리 생존권 충돌의 후유증


영하 14도의 추위가 몰아쳤다.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정문에서 얼마 안 떨어진 송전탑 위에 해고자 3명이 올라가 있었다.
농성 56일째. 두툼한 파카를 껴입은 모습이 추워 보였다.
송전탑 밑에는 귀마개를 한 경찰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는 '쌍용차 사태'의 실상을 모른다.
여야는 '국정조사'로 다투고, 회사 측과 농성자 측의 주장은 팽팽히 맞서 있다.
김규한(45) 현 쌍용차 노조위원장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우리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 너희는 호의호식하고, 저쪽(농성자들)은 불쌍하다고
규정해버린다. 지금껏 우리는 '벙어리 삼룡이'처럼 지냈다. 그들이 우리보다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다는 건 인정하지만, 우리도 여기(공장)에 앉아 고기 먹으며 호의호식하는 나날을 보내진
않았다는 것이다."

―출퇴근 때 송전탑 앞을 지나면 당신은 어떤 마음인가?

"마음이 아프지만, 공장 안에서의 고통과 번민도 있는 것이다. 직장을 살리기 위해 힘들게 산
세월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해자의 일원처럼 받아들여진다. 뭐라고 하면 손가락질 받는
대상밖에 안 된다. 야당 의원들은 해고자들에게만 찾아갔다. 약자의 편이라는 것은 좋다.
하지만 심판을 보더라도 양쪽 의견은 들어봐야 하지 않는가."

―복직을 요구하는 해고자들은 한때 동료였지 않은가?

"우리가 공장을 잘 살려야 그들에게도 기회가 있다. 다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바깥에서 우리를 흔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무책임하게 관여하고 있다. 복직 여부는 그런
정치 논리가 아닌 공장의 생산 물량에 달려있다. 쌍용차가 많이 팔리면 복직이 빨라지고,
안 팔리면 지금 인원도 남아도는 것이다."

3년 전, 쌍용차 전체 직원의 3할이 넘는 2656명이 '대량 해고' 통보를 우편으로 받았다.
회사 경영으로만 보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당시 대주주였던 '상하이 자동차그룹'은 손을 털고 떠났다.

직원들은 해고 통보를 받은 '죽은 자'와 그걸 면한 '산 자'로 갈렸다.
파업 초반에는 '죽은 자'를 주축으로 '산 자'의 일부가 가담했다. 2
009년 봄에서 여름까지 이어진 '쌍용차 77일간의 옥쇄(玉碎) 파업'이었다.
파업이 장기화하자 '산 자'들은 회사 편으로 돌아섰다. 서로 '생존권'이 충돌한 것이다.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나는 '산 자'에 속했다. 하지만 한 달 넘게 동참했다. 지도부에게 '사 측과 협상할 의지가 있느냐'를
물었다. 나중에는 민주노총이 개입해 '정권타도' 구호까지 나왔다. 노조 지도부는 정치인이 아니다.
자신을 뽑아준 조합원의 안위와 복지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런 요구가 관철되지 않아 농성장에서
빠져나왔다."



당시 언론은 쌍용차 노조의 '옥쇄 파업' 현장이 전쟁터를 방불했다고 보도했다.
공장에는 철조망이 처졌다.
'죽은 자'들은 새총으로 볼트를 쏘고 화염병을 던졌다.
지게차를 몰고 '산 자'들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경찰 병력 40개 중대가 겹겹이 둘러싼 채 포위망을 좁혔다.
헬기로 공중에서 최루액을 살포했다.
결국 노조는 협상에서 백기를 들었다.

"같이 단결해 끝까지 주장하면 이긴다는 파업 논리는 쌍용차 사태 때 무너졌다. 전쟁(파업)을
치르는 걸 구경만 해도 부담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노노(勞勞) 갈등을 빚으며 직접 싸웠고
이들을 몰아냈으니 왜 죄책감이 없겠나. 파업이 끝난 뒤 심리 상담과 치료 없이 곧바로 일을
해야 했다. 사실 우리도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가슴에 응어리가 맺힌 게 많다."

파업 참가자들은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당초 '해고 통보' 숫자와 비슷했다.
그 뒤 3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실직자들은 공장 바깥을 떠돌았다.
지난주 처음으로 무급휴직자 455명에 대한 복직 합의가 이뤄졌다.

"지금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는 바깥 농성자들에 대해 상반된 감정을 갖고 있다. 미안함도 있지만,
파업 당시의 감정적 앙금도 남아 있다. 이들의 복직에 대해 불편해한다. 우리의 일자리와 급여를
쪼개서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설득해야 하는 게 노조의 의무였다."

―회사의 결단이 아니라, 동료가 자신의 밥그릇을 나눠줘야 한다는 뜻인가?

"우리 조합원들이 양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복직에는 내부적 동의가 있어야 했다. 지난 한진
중공업 사태처럼 정치적 압박으로 그들이 들어올 수는 있다.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는 걸로 끝이다.
사후 관리를 해주는 게 아니다. 복직시켰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안에서는 충돌과 마찰이 일어난다. 쌍용차는 무너진다."

―무급휴직자에 대한 복직 조치가 됐지만, 송전탑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이를 국정 조사를 피하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자동차 생산 공장이면 24시간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오후 5시 반이면 끝난다. 불이 꺼진다. 물량이
없어 야근이 없다. 생산 물량이 있어야 복직도 있는 것이다."

―실직 뒤로 본인과 가족을 합쳐 23명의 자살자가 생겼다.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
라고 보지 않는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게 맞다. 이들이 죽음의 문제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속이고 있다.
하지만 저들이 약자(弱者)고, 우리는 직장이 있어 참아왔다. 이제는 할 말을 하고, 진실과 왜곡을 가
려야 한다."

―무엇이 왜곡이라는 말인가?

"자살이 아니라 질병, 가정 문제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내 입으로 다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죽음이 모두 구조조정에 의한 자살은 아니라는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해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 아닌가?

"그분들의 가정사에 대해 말할 입장은 아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다른
이면도 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내가 말하기 곤란하다. 문제는 농성하면서 '자살자
23명'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분들의 죽음을 갖고 자신들의 목적 달성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죽음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나?

"그분들이 죽은 것처럼 우리도 복직시켜주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 그러니 자신들이 회사에 다시 들어
와야 한다는 논리다. 정말 숨진 분을 생각한다면, 23명의 가정에 회사가 무엇을 해줘야 할 것인지부터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가장(家長)의 실직은 가정의 붕괴로 이어진다. 해고자나 그 가족들로서는 현 노조가 자신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너무 눈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김규한 위원장은 “정치인들이 그렇게 안타까우면 쌍용차 한 대 사주기 운동을
벌여라”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지금 공장을 떠나 있는 분들은 모두 2616명이다. 이 중 해고자는 159명뿐이다. 지금 농성하는 분들은
해고자들이다. 그 속에는 파업지도부가 상당수 있다. 이 때문에 해고자의 목소리만 들린다. 자신들의
복직만 계속 떠들고 있다. 장군(將軍)이라면 포로석방 때 병사부터 내보내야 한다. 장군은 마지막
순번이다. 그분들에게 '회사의 능력이 되면 복직은 무급휴직자→희망퇴직자→해고자 순'이라고
분명히 얘기했다. "

―노조위원장이라면 농성자들을 만나 위로하고 설득해야 하지 않는가?

"최근에 만난 적은 있다. 저들은 우리를 '어용노조'로, 우리는 저들을 '실패한 강성노조'로 본다. 어떻
하면 같이 살 수 있는가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야지, 정치적 명분 공세만 하니 효과가 없었다."

파업 종료 한 달 뒤 법정관리 상태에서 그는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그는 "조합원도 배부르고 기업도 이윤이 나야 한다"고 내세웠다.
민주노총에도 탈퇴했다.
쌍용차가 인도의 '마힌드라 그룹'으로부터 자본을 유치할 때 협상 대표로 참여했다.

"우리는 파업하는 것이지만, 외국 자본에는 쌍용차가 전쟁터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유치 협상에서
'투자만 해주면 내 임기 3년 동안 절대 파업하지 않겠다. 대신 고용을 보장해 달라'고 했다(마힌드
그룹은 5220억원을 투자해 쌍용차 지분 70%를 사들임). 우리는 무(無)쟁의 약속을 지켰다. 지난
9월 선거에서 나는 다시 위원장에 당선됐다. 국내 완성차 5개사 중에서 위원장에 연임된 경우는
처음이다."

―사용자 측과 결탁했다는 비판을 받지 않나?

"어용(御用)과 민주의 차이는 발상의 차이다. 파업을 하지 않으면 어용인가. 싸우지 않고 협상력으로
얻는 게 최상의 방책이다. 꼭 얻어내야 할 것은 얻고 양보해야 할 것은 양보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한다."

―정치권의 국정조사에 대해서 왜 반대하는가?

"우리가 좀 해보려고 하면 국감과 청문회를 해왔다. 또 국정조사의 도마에 올리려고 한다. 해외 시장
에서는 '저놈의 회사는 무슨 문제가 있어 국회에서 늘 불러내느냐'고 할 것이다. 누가 쌍용차를 사겠는가.
가령 딱지를 붙여놓고 주인에게 법원에 오라 가라 하는 전셋집에 들어가겠는가. 우리는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왜 자꾸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는가."

―이런 대량 실직과 죽음의 문제를 정치권에서 눈감고 있어야 하는가?

"지난 3년간 우리가 '쌍용차 살려 달라'며 정치권에 자금난을 호소했을 때, 과연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있느냐. 이제 공장이 좀 될 만하니까 우리를 희생양으로 몰고 간다. 정치인들이 그렇게 안타
깝다면 차라리 '쌍용차 한 대씩 사주기 운동'을 벌여라. 차를 팔아주는 것이 복직의 길이다."

―파업 뒤로 신규 채용이 있었나?

"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연구소에서는 있었지만, 생산 현장에는 아직 없다. 파업 때 살아남은 노동자
들끼리 그대로 근무하고 있는 셈이다."

―쌍용차에는 얼마나 근무했나?

"20년이 됐다. 고등학교를 나와 첫 직장이다. 자재과에서 배터리 등을 나누는 일을 했다. 입사할 때 쌍
용그룹이 대주주였다. 그 뒤 대우, 워크아웃, 법정관리, 상하이 자동차, 법정관리, 마힌드라 그룹으로,
4~5년마다 주인이 바뀌었다. 우리에게는 안정된 생활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과거에 비하면 어떤가?

"고용 불안이 없어졌다. 아침에 눈떠서 출근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네 잎 클로버의 행운만 찾았다.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다. 갑자기 행운은 찾아오지 않는다. 행복을 잘 지켜야 행운이 오는 것이다."

쌍용차 공장은 올해 판매 목표를 14만7000대로 잡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오후 5시 반의 어둑함 속으로 직원들이 움츠린 채 퇴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