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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여기 다 있다

*바다향 2015. 11. 6. 00:00

 마자르 평원의 풍차

ⓒ 이상기

 

두나이강은 브라티슬라바에서 에스테르곰(Esztergom)에 이르기까지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국경을 이룬다.

그리고 헝가리 사람들은 두나이강을 두나강이라고 부른다.

고속도로는 두나강의 남쪽을 따라 서에서 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길이 강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더 이상 두나강을 볼 수가 없다.

길 주변으로는 넓은 평원에 해바라기 밭이 펼쳐져 있고, 풍차만이 돌아간다.

이 지역에서는 밀을 이미 수확했는지 빈 들판이 곳곳에 보인다.

 

마자르 평원으로 불리는 평야지대를 지나 부다페스트에 가까워지면서 야산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자르(Magyar)는 헝가리 사람이 자신들 민족을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가 부르는 헝가리는 영어식 표현이다.

그리고 마자르족이 세운 나라가 마자로르사크(Magyarorszag)다. 마자르 공화국이란 뜻이다.

우리는 M1고속도로를 타고 부다페스트 외곽에 도착한다.

 

 

 겔레르트 언덕의 시티투어 버스

ⓒ 이상기

 

부다페스트는 남북으로 흐르는 두나강의 동서 양쪽으로 발달된 도시다.

강의 서쪽이 부다고, 강의 동쪽이 페스트다.

부다는 높은 지역에 발달한 구도시고, 페스트는 낮은 지역에 발달한 신도시다.

 

우리는 브라티슬라바에서 부다페스트로 가기 때문에 강의 서쪽인 부다로 들어가게 된다.

부다에 접근하면서 구릉과 야산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언덕을 돌고 돌아 겔레르트 언덕 꼭대기로 올라간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부다와 페스트

 

겔레르트 언덕에 이르니 부다페스트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다.

그나마 차가 밀리지 않아 제 시간에 도착해 다행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두나강 양쪽으로 발달해 있는 도시 부다페스트를 보기 위해 우리는 전망대로 향한다.

그곳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부다페스트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찾는 곳이 바로 겔레르트 언덕이기 때문이다.

 

 

 두나강 왼쪽의 부다와 오른쪽의 페스트. 강위에 세체니 다리가 보이고, 그 왼쪽에 왕궁이, 그 오른쪽에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 이상기

 

겔레르트(Gellert: 980-1046)는 이슈트반왕(Szent Istvan: 969-1038)과 함께 헝가리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차나드(Csanad) 주교로 부임해 헝가리 왕가의 교육을 담당했고, 당시까지 이교도 국가였던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그는 1046년 9월 이교도들의 폭동으로 이곳 겔레르트 언덕에서 순교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교도들이 그를 못이 촘촘히 박혀있는 나무통 속에 넣은 다음, 그 통을 이 언덕으로부터 두나강으로 굴려 익사시켰다고 한다.

 

그 고통의 언덕에서 우리는 부다페스트 1000년 역사를 조망한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세체니(Szechenyi) 다리, 국회의사당, 마르기트 섬 그리고 왕궁이다.

세체니 다리는 두나강에 가장 먼저 생긴 다리로, 이슈트반 세체니(Istvan Szechenyi) 백작의 제안으로 1839-1849년 만들어졌다.

다리 양쪽으로 주탑을 세우고, 케이블로 연결한 다음 줄을 늘어뜨려 무게를 지탱하는 전형적인 현수교 방식이다.

 

 

 세체니 다리 야경

ⓒ 이상기

 

이 다리를 설계한 사람은 유명한 영국 기술자 윌리엄 클라크(William Tierney Clark)였고,

다리를 완성한 사람은 그의 사촌인 아담 클라크(Adam Clark)였다.

그래서 세체니 다리 부다쪽 광장의 이름이 아담 클라크 광장이다.

세체니 다리의 길이는 375m나 된다. 그리고 양쪽 주탑 사이의 길이는 202m다.

그러나 세체니 다리는 두나강의 다른 다리와 마찬가지로, 1945년 퇴각하는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다리가 다시 놓인 것은 1949년 11월 21일이다.

다리 건설 100주년을 기념해서 다리가 개통되었고, 1957년부터는 다리에 조명을 밝혀 부다페스트 야경을 밝히는 다리가 되었다.

현재도 세체니 다리는 부다페스트의 상징으로 여겨져, 관광 안내서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동전과 우표 등에 세체니 다리가 나온다.

현재 부다페스트 지역 두나강에는 세체니 다리를 포함, 9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민의의 전당과 왕권의 상징이 강의 이쪽과 저쪽에 있다.

 

 

 국회의사당

ⓒ 이상기

 

1873년 부다, 페스트, 오부다가 합쳐 부다페스트라는 새로운 도시로 탄생했고, 그 결과 국회의사당이 건설될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 헝가리 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민의의 전당을 세우고자 하는 시민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1883년 건축 공모가 이루어졌고, 임레 슈타인들(Imre Steindl)의 신 고딕양식 건물이 선택되었다.

이 건물은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를 모방하면서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해 설계되었다.

 

국회의사당 건축은 1885년 시작되었고, 1896년 부다가 헝가리 왕국의 수도가 된 지 천년을 기념해서 1차로 완공되었다.

그러나 건물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은 1904년이다. 겔레르트 언덕에서는 국회의사당의 측면이 보인다.

측면의 길이가 123m이고, 두나강 쪽으로 향하고 있는 정면의 길이는 268m나 된다.

그 정면을 우리는 어부의 요새에 가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의 한 가운데 돔의 높이가 96m나 된다.

 

 

 국회의사당 야경.

ⓒ 이상기

 

96m는 헝가리 건축 높이의 한계선이다. 그것은 896년이라는 헝가리 건국연도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멀리서 보기에 이 건물의 아름다움은 두 가지다.

나는 벽의 흰색과 지붕의 붉은색이 이루어내는 대비와 조화다.

지붕의 색은 정확히 말하면 적갈색이다. 그런데 이 색깔이 건물에 중후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리고 건물의 벽과 창문도 인상적이다.

또 다른 하나는 365개나 되는 첨탑이다. 이 첨탑이 주는 날카로움과 화려함은 강렬함의 극치다.
     
이제 강의 이쪽 부다를 바라보면 바로크 양식의 왕궁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왕궁이 처음 자리 잡은 것은 13세기 초라고 한다.

그리고 마차시(Hunyadi Matyas)왕이 통치하던 1458-1490년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결합된 왕궁이 지어진다.

그러나 터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해방전쟁(1686)에서 왕궁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1714년에야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왕궁을

짓기 시작했다.

 

 

 왕궁

ⓒ 이상기

 

이 왕궁은 1770년에야 완성되었으나, 1848/49년 민중들의 해방전쟁으로 일부가 불타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890-1903년 건축가 이블(Miklos Ybl)과 하우스만(Alajos Hauszmann)에 의해서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신바로크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45년 1/2월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다시 한 번 파괴되었고, 1978년에야 현재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재건될 수 있었다.

 

왕궁은 건물과 마당을 포함해 길이가 400m, 폭이 200m쯤 되는 직사각형의 복합건물이다.

앞쪽으로 성벽과 망루가 보이고, 뒤쪽으로는 마당과 정원이 보인다.

건물에서는 고전주의 양식의 원형 지붕이 돋보인다.

건물 안쪽으로 분수, 동상, 조형물이 있다고 하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단지 녹슨 청동지붕과 수 많은 창문이 문에 들어올 뿐이다.

 

 

 왕궁 야경

ⓒ 이상기

 

현재 왕궁에는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다. 그 중 역사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박물관은 왕궁의 동남쪽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국립미술관은 왕궁 건물 중 3개동, 4개층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세부터 현대까지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 20세기 이후 동시대 예술을 전시하고 있는 루드비히 박물관, 800만권의 도서와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세체니 국립도서관이

들어있다. 

 

어부의 요새와 마차시 교회는 어떤 곳인가?

 

겔레트트 언덕에서의 조망을 즐긴 우리는 이제 클라크 광장을 지나 어부의 요새(Halaszbastya)로 간다.

어부의 요새는 어떻게 만들어진 단어일까?

어부라는 말은 중세 때 이곳에 어시장이 있어서 나온 말이다.

시장 주변에 어부들의 길드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요새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요새가 일종의 성벽처럼 만들어져, 유사시 어부들이 이곳을 방어진지로 삼아 부다 시내를 보호할 수 있었다.

 

 

 어부의 요새

ⓒ 이상기

 

그런데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신낭만주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어떤 게 신낭만주의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특이한 것은 요새처럼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벽과 그 위로 만들어진 전망형 테라스다.

전망형 테라스는 주랑처럼 되어 있어, 평상시에는 물건을 파는 시장으로, 비상시에는 적을 맞아 싸우는 요새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어부의 요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누가 뭐래도 원뿔 형태의 탑이다.

유목민족이던 마자르족의 천막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아랫부분은 원통형으로 만들어 창을 냈고, 윗부분은 원뿔 형태로 만들어 윗부분을 뾰족하게 했다.

돌이 모두 흰색이어서 상당히 신비스런 느낌이 든다.

어부의 요새에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을 여러 번 올라야 한다.

계단을 오르면 좌우로 어부의 요새가 이어지고, 전면에는 마차시 교회(Matyas templom)가 나타난다.

 

 

 성처럼 생긴 어부의 요새.

ⓒ 이상기

 

우리는 먼저 좌우 두 군데 어부의 요새를 돌아본다. 좌측의 것보다는 우측의 것이 더 특별하다.

그것은 우측의 첨탑이 더 크고 웅장하며, 두나강 쪽으로의 전망이 더 좋기 때문이다.

1층 테라스, 2/3층 원통형 , 4층 원뿔형이 결합된 건축으로 동화 속의 성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 2층과 3층에는 기념품점, 레스토랑 등이 있고, 4층은 특별한 행사용 전망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4층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3층을 한 바퀴 돌면서 두나강과 주변 풍경을 조망한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두나강 건너 국회의사당이고, 눈을 산쪽으로 돌리면 힐튼 호텔과 마차시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이제 어부의 요새를 내려와 마차시 교회로 향한다.

마차시 교회가 현재의 자리에 세워진 것은 1255-1269 벨라4세(Bela IV)에 의해서다.

그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14세기 고딕 양식이 결합되어 더 아름답고 화려한 교회가 되었다.

 

 

 마차시 교회

ⓒ 이상기

 

그러한 아름다움과 화려함의 근원은 지붕과 탑의 아름다운 색깔과 무늬다.

그리고 첨탑의 조각도 한몫을 하고 있다.

마차시 교회는 우리가 지금까지 본 쾰른 성당이나 빈의 슈테판 성당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하얀색 벽과 붉은 지붕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정말 아름답다.

앞의 두 성당이 남성적이라면, 마차시 교회는 여성적이다.

 

마치시 교회의 원래 이름은 성모 마리아교회였다.

1470년 마차시왕이 5층짜리 탑을 지었고, 오라토리오를 위한 공간을 확장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마차시 교회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마차시 교회는 또 헝가리왕의 대관식이 열린 교회로 유명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1867년에 이루어진 프란츠 요셉1세와 엘리자베트의 결혼이다.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비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알려져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1000년 역사의 현장,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부다페스트, 이 도시는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겔레르트 언덕과 성채, 왕궁과 그 주변에 있는 마차시 교회, 어부의 요새, 두나강에 놓인 세체니 다리, 다리

건너 페스트 지역의 국회의사당, 영웅광장이 있다.

이들 문화유산은 건축, 조각, 도시의 건설, 풍경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산물이다.

그리고 특정 시대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