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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화암사

*바다향 2015. 3. 5. 22:34

 

완주군 경천면에 있는 화암사 가는 길은 나무숲이 깊은 산처럼 우거져서

나무의 이름조차 헤아릴 수 없어 말 그대로 숨은 보석 같은 길이다.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부터 설레는 절이 있다.

가까워지면 질수록 가슴이 훈훈해지는 절이 완주군 경천면에 있는 화암사다.

경천면 소재지를 지나고 가천리에 접어든다.

맑은 냇물이 아름답게 흐른다고 하여 가천(佳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가천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화암사 입구에 이른다.

나라 안에 절로 가는 길이 아름다운 길이 많이 있지만

화암사로 가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직접 가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절 화암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불우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덥수룩한 나무가 있어,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웠

는데, 가느다란 빛이 구경할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이라고

부른다

나무숲이 깊은 산처럼 우거져서 나무의 이름조차 헤아릴 수 없는 화암사로 가는 길은 말 그대

숨은 보석 같은 길이다.

그 아름다운 정경이 15세기에 만들어진 화암사중창기華巖寺重創記〉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절은 고산현(高山顯)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다. 비록 나무 하는 아이, 사냥하는 남정네라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렵다. 골짜기 어구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 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이른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땅이다.

천천히 오르는 산길, 그 어디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수수하다.

세월의 이끼 얹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오솔길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작은 폭포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숲길의 정취가 마음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 것 같은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백문절(白文節)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의 학자이자 빼어난 문장가로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과 보문각학사를 지냈던 그가

이절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발 붙이기 어렵구나.

()버리고 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통한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나오기 디고, 구름 끝에 보일락 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중략)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 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을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

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 세 장대()기울었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듯한 산길을 한참 올랐다.

그렇게 오르기 힘들었던 바위벼랑 아래 철 계단을 만들어서 옛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화암사를 갈 때마다 나는 항상 그 길을 따라간다.

요란스레 물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보니 70m 쯤 깎아지른 절벽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였다.

쇠다리로 만든 층계가 있지만 옛 사람들이 다녔던 바위벼랑길을 오르며 나는 그 작은 폭포마다 이름을

짓고 싶었다.

마지막 계단을 올랐을 때, 그렇다.

도솔천이 눈앞에 펼쳐지고 화암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 극락전 앞에 조심스레 가만히 서서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아이들을 데리고 이 절에 왔을 때 나는 너무 화암사의 정경에 취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때 어린 딸이 침묵을 깨고서 우화루를 보며 나에게 말했다.

아빠! 저기 의자에 앉자.그때 너무도 낮 익은 풍경에 나는 놀랬었지.

어쩌면 오래전에 혹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절집 우화루에 작은 창문이 있었고 창문

옆에 엇비슷이 약간 찌그러진 나무 의자가 있었지. 조심스레 앉아 나는 개울물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나 자신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빠져 들어 갔었지.

작지만 아늑하고 가슴이 훈훈해지는 절 화암사에 우화루(雨花樓)(보물 662)가 있다.

꽃 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이름의 이 누각은 목조로 지은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누각형 식이다. 외부는 기둥을 세우고 안쪽은 마루를 깔았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전면 기둥들은 이층

이며 계곡을 바라보고 있는 후면은 축대를 쌓은 후 세운 공중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우화루는 건축형식

으로 보아서 극락전을 세운 시기에 만들어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의 초창된 것으로 추측되는 천 삼백여년의 세월을 견디어 온 옛 절 화암사는 창건자나 창건

연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곳의 별장에 와 있을 때 용추(龍湫)

에서 오색이 찬란한 용()이 놀고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던 큰 바위위에 무궁초가 환하게 피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지은 뒤 화암사라고 했다고 한다.

화암사 극락전과 우화루를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실린 화암사 중창기의 내용을 보자.

예전 신라의 원효, 의상 두 조사가 중국과 인도를 편력하다 도를 이루고 돌아와 이곳에 석장(錫杖)을 걸고

절을 지어 머물렀다.

절의 주존불인 수월관음상은 의상스님이 도솔천에 노닐다가 친히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 만든

것으로, 등신대의 원불이다. 절의 동쪽 산마루에 대가 있으니, 그 이름을 원효대라고 하고, 절의 남쪽 고개에

암자가 있어 그 이름을 의상암이라 하는데, 모두가 두 분 조사가 수행하던 곳이다.

원효와 의상 이후 고려시대의 사찰 기록은 거의 없고, 조선 1425년 세종 7년에 전라관찰사 성달생(成達生)

뜻에 따라 당시의 주지 해총(海聰)1429년까지 이 절을 4년간에 걸쳐 중창, 이 때 화암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춘다.

그 후 화암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극락전과 우화루를 비롯한 몇 개의 건물만 남기고 모조리 소실되었으며

훗날에 지어진 명부전과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뜻을 지닌 철령재와 산신각 등의 건물들이 ㅁ자를 형성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극락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 가을에 다시 와 떨어지는 나뭇잎 바라보리라



▲ 목조로 지은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누각형 식을 취한 우화루.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전면 기둥들은 이층이며 계곡을 바라보고 있는 후면은 축대를 쌓은 후 세운 공중

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극락전을 나온 나는 최순우 선생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굽이쳐 흘러가는 소백산 자락의

산들을 바라보았듯이 화암사 극락전의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녹음우거진 산들을 바라보았다.

비 내린 뒤끝이라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쉴 새 없이 내 귀를 어지럽혔다.

나는 허물어 내려앉듯이 적묵당 마루에 앉았다.


적묵당은 우화루와 극락전 사이 서편에서 동쪽을 향하여 후원을 겸한 건물로 날개를 맞대고 서 있는데

마루에 앉으면 한없는 부드러움이 돌아감을 잊게 한다.

지난번 답사 때부터 낮이 익은 해맑은 낮 빛의 젊은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스님은 출타중이시란다.

지난번에도 스님이 안계셨는데 이 좋은 절집에서 스님을 뵐 수 없으니,

러나 알고 보면 같이 온 일행들이나 나도 모두 다 세상이라는 여행길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나름대로의

수행을 쌓고 있는 수행승들은 아닐는지.

극락전으로 들어가 마음 비우고 절을 올렸다.

그때 딸인 듯싶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30대 초반의 젊은 여인이 들어서서 향불을 피웠다.

정성스레 공을 들이는 모녀를 뒤로 하고 극락전을 나와서 우화루 계단을 내려 설 때 폭포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는지도 모른다.

‘가지 말아라’

가을에 다시 나는 화암사에 오리라.

불명산의 모든 나뭇잎들이 색색으로 물들었을 때 또는 더 늦어 그 잎 새들이 한잎 두잎 떨어져 내릴 때

우화루에서 나무로 만든 여닫이문을 열어젖히리라.

그리고 옷깃 여민 채 시간 속에서 시간을 묻고,

길에서 길을 물으며 흐르는 세월 속을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눈시울 적시며 바라보리라.

● 건축학도 필수 답사처 극락전

- 유연한 아름다움 빼어난 하앙식 건축물



▲ 하앙식으로 지어진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


“이 절의 극락전(極樂殿)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물이었다가 국보(국보 제 316호)로 승격되었다.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하던 하앙식(下昻式) 건축물로 지어진 우리나라에 유일의 목조 건축물이라서

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처이기도 하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이고 중앙문은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이며 오른쪽과 왼쪽문은 세

짝으로 된 분합문으로 되어있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조선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극락전은 남쪽을 향하여 지어져 있다.

1m 정도의 높은 기단위에 세웠고, 전면은 처마를 앞으로 길게 빼내기 위하여 하앙을 얹은 후 이중에

서까래를 가공한 것인데, 하앙이란 하앙부재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으며, 특히 건물의 높이를 올려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앙식 건축물은 비바람을 막아 주면서도 그 유연한 아름다움이 빼어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같은 하앙식 건축물 구조의 실례가 많이 남아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현존

양식을 찾지 못하다가 1976년 학계에 처음 보고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그 때 ‘해방 이후 목조건축물 문화재계의 최대의 발견’이라는 찬사가 나오면서 국내외 전문가들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극락전 후면의 처마는 하앙식이 가공되지 않았는데 문의 전면에는 양측의 세 짝 가운데 칸에는 분합문이

되어 있다. 또한 빗살무늬 문살로 짜여 진 좌우측에는 외짝의 출입문이 나있다.

극락전의 기둥은 배흘림 기둥으로 처리되어 있다.

내부에는 가운데에 양목이 얹어져 천정의 높이가 전후 면에서 크게 좁혀진 형국이다.

극락전의 내부 닫집에 비상하는 용의 형태가 인상적이고 비천상이 특이한 형태로 걸려있다.

극락전에는 후불탱화와 불좌대 및 업경대, 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이 있다.

임진왜란 때 종이 소실된 후 광해군 시절 호영(虎英)스님이 주조하였는데, 종각을 세우고 종소리로 중생을

깨우치도록 한다는 뜻으로 종 이름을 자명종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의 특이한 점은 해총스님의 제자들이 직접 흙을 빚어 만든 기와가 6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까지 한 조각 흠도 없이 얹혀 져 있다.

옛 사람들이 절을 지었던 정성과 기술은 정말로 지극한 불심이 아니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외감도 주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불명산 화암사 <상>



화암사 우화루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비밀이다. 비밀은 혼자만 알아야 하는 것이다.

비밀 중 상당수는 세상에 드러나면 치명적인 것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고귀해서 누구와 공유하기 싫은 그 무엇도 비밀의 하나이다.

심마니들이 간직한 그들만의 비밀은 아마 후자에 속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려지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있다. 이른바 노하우(Know how)이다.

장 담그는 법을 며느리도 몰라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심정은 그게 알려지면 그 기술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건 바로 자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찰도 숨겨놓고 혼자만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디 혼자만 아는 절이 세상에 존재하겠는가? 그

저 찾는 이가 별로 없는 절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어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니 절은 이제 그야말로 날마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사찰을 찾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한적한 공간에서 속세의 찌든 때를 씻으려는 것인데 시장바닥처럼

사람들로 바글거린다면 구태여 거기까지 가야할 이유는 없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몸도 부

리고 마음도 다스리고 싶어서 멀리 있어도 산사를 찾는 것이 아닌가?

완주군 경천면에 있는 화암사(華巖寺)는 누구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절이다.

흔히 화암사라고 하면 넘겨짚고 구례 화엄사를 떠올릴 것이다.

구례 화엄사는 어마어마하게 큰 절이다. 그

에 비해 화암사는 아주 작다. 작지만 꽃처럼 아름다운 절이다.

우선 가는 길이 눈부시다.

고산천을 건너 경천에 이르면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도열해 거수경례를 하며 곳곳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물이 아름다운 가천(佳川)에 이르면 또 이름처럼 예쁜 초등학교도 하나 있다.

마을 학교를 꿈꾸는 가천초등학교이다.

그 어렵던 시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학교를 짓고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그 가천에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다.

천변을 따라 심어 놓은 코스모스가 일제히 꽃망울 터뜨리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렇게 요동마을에 접어들면 비범한 나무 한그루가 맞는다. 시무나무다.

필자가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시무나무에 눈길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나무 아래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적혀 있다.



“시무나무는 20리목(二十里木)이라 부른다. 스무, 시무가 옛말로 모두 20리를 뜻한다. 한국과 중국에서만

자라는 1속 1종 밖에 없는 느릅나무과 낙엽활엽교목에 속한다.

시무나무는 일정한 거리를 표시하고 과거 길은 안내하며 특히 마을 입구의 당산목이나 기도목 구실을 하여

잠시쉬어 가는 곳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시무나무에 헌신을 걸어 놓고 과거길에 발병 나지 말고 한양까지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곳을 서낭댕이(서낭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런 이유로 6●25 전까지 요동마을 이름이 신거렁이(新巨)라 불려 졌으며 오늘날에는 아름다운 우리말인

싱그랭이라 불린다.”


시무나무를 지나면 마치 내가 더 오랫동안 이 마을을 지켜왔다는 걸 반드시 증명해야겠다는 듯 옹이가

박힌 늙은 느티나무 몇 그루가 턱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 나무 옆을 지나칠 때면 나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매만지게 된다.

중 당산 역할을 하는 가장 오래된 나무의 왼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접어 차량 교행마저 어려운 소로를 한참 달려야 화암사다. 아니 화암사 주차장이다.

들어오는 길에 비해 주차장이 꽤 넓다. 감나무 울타리가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사람이 쉴 수 있는 정자마저도 감나무 그늘에 의지해 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야 한다.

물론 임도를 달려 차로 화암사 뒤편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그렇게 가면 화암사의 절반은 놓치는 셈이다.

여기서부터는 숲길이다. 하늘이 안 보인다. 한낮에도 사진이 찍히지 않을 만큼 어둡다.

봄이면 초록의 잎들이, 여름엔 녹음이, 그리고 가을엔 단풍이 온몸을 물들일 정도로 아름답다.

어디 그뿐인가?

늦가을이면 낙엽이 발목까지 올라와 지나는 사람들을 위무한다. 정말 치유의 길이다.

그렇게 숲을 지나면 도랑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없다.

그 도랑은 모두 화강암 암반으로 이뤄졌다.

붉은 암반 위를 수정처럼 흐르는 길을 거슬러 오르면 첫 번째 폭포가 나타난다.

아스라한 높이에서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정겹다. 아마 비가 내리면 저 폭포도 장관일 것이다.

절로 이르는 길이 여기밖에는 없다.

그래서 철 계단을 올라야 한다. 147개의 철 계단 옆에는 그림 액자들이 걸려있다.

한 계단 한 계단 마음을 비우고 오른다. 계단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철 계단에 덮여서 두 번째와 세 번째 폭포를 온전히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올라서면 드디어 화암사다.

이렇게 가는 길이 어렵기에 이 절은 그동안 보수를 할 수가 없었다.

자재들을 모두 지게로 져 날라야 했기에 도저히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절은 그대로 퇴색했다.

아니다. 퇴색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무늬를 켜켜이 쌓아간 것이다.

원색의 빛깔에는 세월이 없다.

그래서 오래된 건물의 희미한 단청을 보면 세월의 더께가 느껴진다.

이런 풍경을 보고 어떤 시인은 아주 잘 늙었다고 표현했다.

잘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월이 아름답게 스몄다는 말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월을 아름답게 받아들여야 잘 늙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이 화암사를 찾았다.

얼마나 좋았던지 아무에게도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시로 이야기한다. 역설이다.

그 유명한 시인이 안 알려준다고 말하면 더 알려고 난리를 칠 것이 아닌가?

여기서 잠시 계단 끝에 걸린 시인의 시를 읽고 숨을 고른다.

우화루(雨花樓)가 환하게 들어온다.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의 <화암사(花巖寺), 내 사랑>

 

 


 화암사

 

신라 진성여왕 3년(694년)에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설총도 한때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극락전은 1425년 성달생의 시주로 건립됐으며,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했던 하앙식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이다.
우화루 또한 고대 건축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건물로 보물 제 6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해군 때 만들어진 동종은 호영이 주조한 것으로 절이나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을 때에는 스스로
소리를 내어 위급함을 알려주었다고 하여 자명종이라고 부른다.
화암사는 불명산의 원시림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문화유산답사와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운치 있는 곳이다.

 


제 2 코스: 점심식사(원조화심순두부)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다보면 화심리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화심온천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

그러나 실제로는 온천 이전에 두부를 먹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

강릉의 초당이나 속초의 학사평처럼 두부마을로 알려져 있기도 한 곳.

이곳에 향토 전통음식점으로 지정된 화심순두부 집이 있다.

 

송광사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천년 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 (867년)에 구산선문의 개산조인 보조체징선사가 개창하였다.
원래의 사명은 백련사였으며, 현재의 일주문이 3km밖 나들이라는 곳에 서 있던 대찰이었으나, 역사의 변천
속에 거의 폐찰이 된 것을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중창을 발원하신 후 현재의 도량 전각들은
1600년대 보조 지눌국사의 법손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