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 사해, 아카바, 와디럼….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마다 벅찬 숨을 내쉬었다.
미끈대는 소금바다와 붉은 모래의 감촉, 잿빛 바람에 묻혀 오던 베두인의 체취, 때마다 울려 퍼지던 굴곡진 아잔*소리와
사멸한 도시의 거대한 침묵.
모세의 기적처럼 놀라운 희열이, 요르단 왕국이, 순간마다 스며들었다.
*아잔adhān | 이슬람교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육성
●요르단을 만난다는 것은
“괜찮겠어?”요르단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한결같았다.
요르단과 페트라Petra를 동의어로 각인시키며 고조된 여행자가 그 염려의 이유를 알아채는 데는 몇 번의 눈 껌뻑일 시간이 필요했다.
중동,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자리한 한반도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땅.
요르단은 왼쪽으로 이스라엘, 위쪽은 시리아, 오른쪽은 이라크, 아래로 사우디아라비아를 국경으로 접하고 있는, 지도만 보더라도
참 난해한 나라다.
페트라를 잠시 제쳐두고, 지난해 IS에 대한 보복으로 군복을 입고서 직접 공습을 진두지휘했던 압둘라2세 요르단 국왕이 먼저 떠오
르는 것도 사실이다.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터키 제국이 몰락한 후 트랜스요르단으로 출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입헌군주국이 된 게 1946년. 아무리
아랍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유대관계를 강조하는 중동지역이라 해도 알다시피 경계를 둘러싼 정치·경제·사회 상황은 복잡하다.
중동 평화협상과 친親서방 아랍 국가들간 탁월한 중재자 역할을 해 온 요르단 또한 인접국으로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세 차례의 중동-이스라엘 전쟁 때 요르단으로 이주한 수백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걸프전 때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이주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최근 시리아 난민들까지 합하면 난민의 규모는 엄청나다.
1948년 45만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지금은 약 680만명이다.
그들이 일으키는 변화는 분명 불안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요르단 정부의 포용력으로 양질의 국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이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새로 추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였다는 것 외, 심지어 구약과 신약 시대의 무대라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이슬람 왕조들과 십자군 시대의 유적들은 차치하고라도 성서에 등장하는 지명 가운데 96곳이 요르단에 있는 데도
말이다. 상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여정, 요르단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아찔한 현기증마저 일었다.
●Dead Sea 사해
죽은 바다의 힘
차는 사해死海를 향해 달렸다. 좌로도 우로도 삭막한 광야다.
광야. 요르단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텅 비고 아득한 들에는 이따금 양떼가 지나가고 유목민의 허름한 텐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 잡고 있다.
특급 호텔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사해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은 바다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해수면 아래 400m에 자리한다.
길이 75km, 폭 6~16km. 북부지역은 깊이가 400m에 달하고 남부지역은 5m 정도다.
물이 흘러들기만 하고 빠져나갈 곳 없이 증발되다 보니 염도가 높아 생물이 살 수 없다.
염도가 약 5%인 보통 바다와 달리 사해의 염도는 33%가 넘는다.
대신 많은 유기물이 피부와 신경통에 좋다고 해서 물과 진흙으로 만든 미용 제품은 기념품 일 순위다.
사해는 또한 천연자원의 보고다.
마그네슘과 칼슘염 등 화공 약품과 의약품의 원료로 쓰이는 화학물질이 수억 톤씩 매장돼 있다.
그런 사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는 그저 소금밭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 댐을 건설하고 사해로 유입되는 요단강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라 가이드 압둘라는 말했지만, 어찌 그뿐일까.
온난화로 지표면은 건조해지고 물줄기는 말라 가는 것을.
호텔에 짐을 풀고 해변으로 나갔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에게 사해는 더할 나위 없다. 부력이 높아 저절로 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뛰어들면 곤란하다. 해변 앞 경고문에는 입수 전 주의사항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얼굴은 담그지 말고, 배영자세로 수영하고, 다이빙 하지 말고, 멀리 나가지 말고…’,
결국 ‘상처가 있으면 들어가지 마라’는 항목에 다다라 입수는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몸을 뒤집은 채 사해를 둥둥 떠다녔다.
손으로 움켜쥔 바닷물은 기름처럼 미끈대고 심하게 끈적인다.
괜한 아쉬움에 돌에 붙은 소금 한 덩이를 떼어내 혀에 대보고는 컥컥대며 내뱉는데, 누군가 입을 헹구라고 민물을 건네준다.
“왜 수영 안하죠? 걱정 말아요. 그냥 뜨는 걸요. 내가 당신을 치유해 줄게요.”
빨간 모자를 쓴 안내요원은 진흙까지 건네며 예수의 기적이라도 행할 것처럼 ‘치유Healing’란 단어를 되풀이했다.
그런 그에게 사해를 보고 흥분해 뛰어오다 무릎이 까졌다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 없었다.
●Baptism Site 예수 세례터
요단강 위를 흐르는 것들
요르단에는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곳곳에 있다.
중요한 곳 중 하나가 요단강이다.
특히 성지순례를 하는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요단강에 들른다.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신약성서의 기록 때문이다.
4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적 생애를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또 하나의 자연적인 국경을 이루는 요단강은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해 사해로 흘러든다.
251km에 이르는 강의 서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동쪽이 골란고원과 요르단이다.
요단강 폭은 불과 5m도 되지 않아 보였다.
그 지점을 사이에 두고 요르단과 이스라엘 정부는 각각 세례터를 만들었다.
요르단 쪽 세례터는 ‘알마그타스’, 웨스트뱅크 즉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 세례터는 ‘까스르 엘 야후드’다.
1994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협정 전까지 이 일대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요르단이 알마그타스를 개방한 것은 2002년, 이스라엘은 주변의 지뢰를 제거하고 2011년이 되어서야 세례터를 완전히 개방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장소라면 그 강이 다를 리 없을 텐데 유네스코는 지난해 요르단 세례터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부분은 기독교 내부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찌됐든 오늘날 성지순례 코스의 대부분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짜여지는 만큼 순례자 대부분은 이스라엘 세례터로 몰린다.
도착 때에도 건너편에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로 보이는 이들이 연신 강에 온몸을 담그며 세례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반면 요르단 쪽에서는 여행자 몇몇이 제방에 앉아 그 광경을 신기한 듯 바라보기만 했다.
동쪽인지 서쪽인지 혹은 예수가 요르단의 알마그타스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그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없다.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이천년 전 예수가 요단강에 왔었다는 사실이다.
흙이 씻겨 내려와 누렇게 변한 요단강을 뒤로하는데, 가이드 압둘라가 강물을 손에 적셔 머리에 뿌리며 알 수 없는 아랍어로 기도를
해준다. “나는 무슬림이에요. 하지만 요단강에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 것을 보면 이 강물은 분명 성스러운 것이죠.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요단강은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입니다. 당신과 당신 가정에 축복이 있기를!”
광야에 피어난 불꽃 요르단Jordan②Mt. Nebo느보산, Madaba마다바
●Mt. Nebo 느보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디에
구약시대의 흔적들보다 후대 비잔틴시대의 유적으로 더 유명한 곳이 ‘느보Nebo’와 ‘마다바Madaba’다.
암만 남쪽 25km에 자리한 느보산은 모세가 숨을 거둔 자리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끈 모세는, 구약 신명기 34장에 따르면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보았지만 정작 자신은 가지 못한 채 광야 40년의 여정을 마쳤다.
광야를 지나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랐다. “저기가 예언자 엘리야가 승천한 곳이에요.”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했다고 전해진다.
압둘라 가이드가 차창 너머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리에는 광야에 교회만이 덩그러니 서서 승천의 위치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해발 774m 느보산에는 모세기념교회가 있다.
기원후 4세기경 세워진 교회는 비잔틴시대의 전통에 따라 성서 이야기를 담은 거대한 모자이크 장식이 교회 바닥을 덮고 있는데
마침 교회는 내부공사가 한창이라 모자이크는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건 이스라엘 땅이 내려다보이는 시야가 봉우리에 세워진 작품이다.
구리로 만든 뱀이 십자가 형태의 장대를 휘감고 있는 이 작품은 이탈리아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Giovanni Fantoni가 제작했다.
구약 민수기 21장, 모세가 시나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리려고 놋으로 만든 불뱀을 장대 위에 달아 이를 본 자들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인데,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구리 뱀은 하느님의 치유 능력을 상징한다.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는 그곳에는 가나안, 지금의 이스라엘이 펼쳐져 있다.
사해 저편은 그저 황량하고, 첨예한 갈등마저 뒤덮인 곳으로 보일 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모세의 광야 40년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면 그때는 저 땅에 젖과 꿀이 흐르고 있을까.
예언자가 아닌 평범한 누구라도 평화가 왔음을 알 수 있는 그런 때 말이다.
시야가 봉우리에 세워진 십자가 형상의 구리 뱀. 구약성서의 내용을 모티브로 이탈리아 조각가가 제작했다
●Madaba 마다바
모자이크의 도시
암만에서 남쪽으로 30km 지점에 있는 고대도시 마다바 또한 비잔틴시대 교회 모자이크로 유명하다.
도시 곳곳에 모자이크 수백점이 남아 있다.
1880년대 초 사해 동쪽 카락 지방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 신자들 간 불화로 2,0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마다바로 이주했다.
그들이 비잔틴시대 교회 터 위에 새 교회를 짓던 중 당시의 모자이크가 다수 발견됐다.
그중 그리스정교 성 조지교회의 바닥 모자이크는 560년경에 만든 지도로 크기가 가로 15.5m, 세로 6m에 이른다.
이는 근대 지도학이 등장하기 전 팔레스타인 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정밀한 것으로, 당시 순례자들에게 교회의 위치를 알려주는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일정한 크기로 잘게 쪼갠 색색의 천연 돌조각 200만개를 모아 북쪽으로 레바논에서 남쪽으로 나일 삼각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묘사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은 3분의 1뿐이다.
광야에 피어난 불꽃 요르단Jordan③Petra페트라, Wadi Rum와디 럼
●Petra 페트라
상상 이상의 신비
요르단의 국보 1호인 페트라는 여행의 백미다.
물론 영화 <인디아나 존스>나 <트랜스포머>가 이곳에서 촬영됐다는 점도 명성에 한몫했을 테지만,
페트라의 가치는 그런 유명세로 저울질 할 차원은 아니다.
베두인들은 페트라에서 여행자들에게 낙타나 당나귀를 태워 주고 생계를 이어 간다
그리스어로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는 돌산을 조각해서 만든 거대한 도시다.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붉은 도시’라고도 부르며, 나바트 문명의 중심지로 로마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크게 번성했다.
나바트인들에 대한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다만 기원전 6~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유목민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들은 토착민이었던 에돔인들과 함께 페트라를 건설했고, 교역의 중심지로 키웠다.
기원전 2세기에는 페트라를 수도로 한 나바트 왕국을 세웠고 그리스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아 200년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정복당하고, 이후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페트라의 암석 건물들은
교회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7세기경 지진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812년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dt에
의해 다시 존재를 드러냈다.
왕의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남북으로 뻗은 왕의 대로King’s Highway는 고대 무역상들의 교역로로 지금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연결한다.
이스라엘 국경이 가까워지다 보니 세 번의 검문을 거쳐 와디무사에 도착했다. 페트라에는 숙소가 없어서 여행자 대부분은 약 2km
떨어진 와디무사 지역에 여장을 푼다.
바위산 깊이 숨어 있는 페트라로 가기 위해서는 하늘을 가리는 거석을 가로지르는 좁은 협곡 ‘시크’를 2km쯤 걸어야 했다.
페트라 입성에 이보다 더 우아한 전주는 없을 것이다. 높게는 100m가 넘는 바위들은 지루할 틈이 없다.
웅장하고 기묘하며 온통 붉다. 암석 아래로는 물을 끌어들였던 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시크가 끝날 무렵, 갑자기 바위 사이로 시야가 환해지면서 경이로운 건축물이 고개를 내민다.
카즈네Al Khazneh다. 베두어로 보물창고를 뜻하는 카즈네는 기원전 1세기 그리스 건축양식의 건물이다.
높이 43m, 너비 30m의 2층 구조로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 있고, 맨 윗부분에 항아리 형태의 조각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트인들이 보물을 숨겨놓았다는 전설로 인해 보물창고라 불린다.
실제로 카즈네는 왕의 무덤과 신전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카즈네의 감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수많은 돌무더기와 광대한 유적들이 펼쳐졌다.
원형극장은 7,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40층의 계단식 건축물로 나바트인들이 종교의식을 치르고 로마인들은 공연장으로 사용했다. 맞은편에는 바위에 구멍을 뚫어 만든 무덤들이 있는데 1985년 페트라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베두인들이 살았었다. 좀 더 들어가면 거대한 왕족의 무덤도 있다.
카즈네를 비롯한 건축물들의 내부는 의외로 단순하다.
돌을 파내 직사각형의 방을 만들고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어 암석 고유의 색과 무늬가 드러난다.
페트라 유적은 지금까지 확인된 곳만 4,000여 곳, 아직도 상당수가 발굴 중이고 발굴된 것들 중에도 용도를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개방된 것은 전체의 4분의 1. 그 유적만 얼핏 후회 없이 본다 해도 2~3일은 걸린다니, 1,000년 넘게 잠자던 고대도시와의 몇 시간
대면이 아쉬운 여행자의 발길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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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1.daumcdn.net/news/201607/15/travie/20160715151913710havz.jpg)
●Wadi Rum 와디 럼
붉은 사막에서의 하룻밤
페트라에서 남쪽으로 60km, 와디 럼으로 간다. 와디 럼은 사막이다.
3억년 세월을 견뎌 온 그 사막은 그러나, 붉은 모래 위로 바위산들이 솟아 있고 낮은 풀들이 자라는,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사막이다.
자연보호구역인 동시에 유네스코복합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와디’는 비가 오면 강을 이루고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마른 계곡이 되는 땅이고, ‘럼’은 높다는 뜻이에요. 와디 럼은 원래 바다였어요. 오랜 시간 침식과 융기를 거쳐 산과 협곡, 사막이 생겨난 거죠. 이곳은 정말 특별해요. 왜인지 알아요? 이런 바위산과 어우러진
붉은 사막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두바이에서도 볼 수 없죠.”
압둘라 가이드의 말처럼 와디 럼이 시작되는 순간 고개를 내저었다.
이토록 진기하니 오죽하면 영화 <마션>에서 지구 아닌 화성이 되었을까.
오늘의 잠자리는 이 붉은 사막 위 여행자 캠프다.
베두인이 안내해 준 텐트 안에는 기대조차 안 했건만 침대며 화장실이며 심지어 욕실용품까지 비치돼 있었다.
안도감과 왠지 모를 씁쓸함이 교차했다.
오후 5시, 일몰을 보기 위해 개조한 사륜구동 지프 뒷좌석에 올랐다.
와디 럼을 찾는 여행자들은 낙타와 지프를 이용해 사막투어를 하거나 트레킹이나 암벽 등반을 즐긴다.
희롱하듯 천천히 혹은 빠르게 지프를 운전하는 베두인의 박자에 따라 사막이 오르내리고, 갑자기 멈춘 붉은 파도 같은 모래언덕
위에는 바람이 윙윙대며 노래를 불렀다.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거쳐 갔다는 카라반들이 남긴 흔적들은 곳곳에 암벽화처럼 남아있었다.
지프가 협곡 사이 텐트촌 앞에 다다랐다.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샤이(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터번을 두른 베두인은 화톳불 위 시커멓게 그을린 주전자를 기울여 익숙한 몸짓으로 샤이 한잔을 건네준다.
달고 향긋한 차가 여행자의 외로움을 뜨겁게 쓰다듬어 주었다. 일몰이 시작될 무렵 바위산에 올랐다.
주위가 점차 금빛으로 물들고 저기 지평선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침묵했고 샤이의 빛깔을 머금은 황혼은 광대한 사막을 타고 여행자의 말초신경까지 흘러들었다.
텐트로 돌아온 때는 모래가 식고 길게 드리운 그림자도 사라질 무렵이었다.
시원한 모래 위를 맨발로 걷는 동안 저녁식사 준비를 끝낸 주인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고기, 닭고기, 감자, 당근, 쌀 등을 넣고 모래 속에서 숯의 열기로 두 시간을 쪄낸 전통음식 자릅Zarb은 먹음직스러운 만큼 맛도
좋았다.
모기떼로 쉬이 잠들지 못했다. 텐트 밖으로 나와 올려다본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동서남북 번갈아 고개를 젖히고 서 있었다.
몇 시인지 모를, 알 필요도 없는 사막의 밤이 깊어 가고 멀리서 늑대 울음이 들려왔다.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에디터 고서령 기자
취재협조 에티하드항공 www.etihad.com, 요르단관광청 www.mota.gov.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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