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서호천길] 골사그내~지지대비~해우재~서호천변~항미정
↑ 조선시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호수 서호가 지금은 도시민들의 좋은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삼남길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가는 도로인 삼남대로에서 유래되었다.
삼남대로는 충청ㆍ전라ㆍ경상도 방향으로 뻗은 길로, 전국 각지로 향하는 9개 도로 가운데 제6로와 제7로를 일컫는다.
제6로는 동작진ㆍ노량진을 건너 과천ㆍ수원을 지나 통영까지 이르는 길이었고,
제7로는 동작진을 지나 삼례ㆍ태인ㆍ정읍을 지나 제주에 이르는 길이었다.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삼남길은 조선시대의 제7로를 엇비슷하게 연결하고 있다.
삼남길은 정확히 말하면 옛길의 복원은 아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용되었던 주요도로인 탓에 자동차 도로로 만들어진 게 대부분이라 길의 형태를
똑같이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지금 시대에 들어서 걷기가 붐을 일으키는 와중에 옛길의 의미를 복원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 지금은 밤나무가 거의 사라진 율전동 구간. 논밭과 아파트가 공존하는 풍경에서 아직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 남았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도로를 피해 이어지는 오붓한 흙길
서호천길은 수원시에 위치한 지지대고개에서 출발하여 서호공원 입구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약 7km에 이르는 코스지만 대중교통으로 접근하려면 의왕시의 '골사그내(골사그네)'에서 출발해야하므로
길이가 더 늘어난다.
골사그내는 지지대고개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로 옛시절에는 맹수의 피해가 극심해 사람들이 안주하기를
꺼려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서 삼남길 표식을 찾아 마을로 들어서면서 걷기는 시작된다.
삼남길 경기도 구간에는 아직 이정표 설치가 되지 않아 나무에 걸린 표지기나 구조물 등에 부착된 스티커를
찾아 길을 이어야 한다.
마을을 지나면 길은 산으로 이어진다.
경작지를 지나 숲에 들면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 식목일 기념 조림지'라 적힌 기념비석이다.
1974년과 76년, 77년에 밤나무와 잣나무 등을 심었다는 정보가 적혀있는데, 실용적인 과실수를 늘리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리 길지 않은 오름길을 지나면 시 경계를 이루는 능선에 올라서며 수원으로 접어든다.
역시 길지 않은 능선을 내려서면 산길 옆으로 1번 국도와 지지대비(遲遲臺碑)가 보인다.
지지대비는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찾았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
현륭원이 보이지 않기에 일부러 행차를 지지부진하게 끌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지지대비는 1번 국도 바로 옆에 있는데, 도로에서 3~4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해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발행된 사진엽서의 사진을 보면 주변 지대와 비석의 높이 차이는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마도 1번 국도를 지금과 같이 뚫으면서 지지대 고개의 높이가 낮아졌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1번 국도는 예부터 군사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길이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때도 접전이 벌어졌는데,
현재의 지지대비를 유심히 살펴보면 포탄으로 인해 생긴 파인 자국들을 확인할 수 있다.
↑ 서호공원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소나무들. 근대에 촬영한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다시 산길을 이으면 이내 넓은 주차장이 나타나며 지지대쉼터에 이른다.
주차장에는 삼남길 정보가 적힌 안내판이 있고, 매점을 겸한 식당도 있어 휴식을 취하기 좋다.
지지대쉼터 이후로는 평평한 흙길이 열린다.
경작지를 지나 작은 언덕을 넘나 싶더니 어느 마을의 콘크리트 길에 접어드는데,
서호천길 코스는 이곳에서 해우재를 둘러볼 수 있게 길을 잡아놓았다.
해우재(解憂齋)는 수원시에서 운영하는 화장실문화 전시관이다.
이는 전 수원시장 심재덕씨가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을 기념하고 세계인에게 화장실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30여 년간 살던 자신의 집을 변기 모양으로 지은 것이다.
2007년 완공된 해우재는 2009년 유족들이 세상을 뜬 심재덕씨의 유지에 따라 수원시에 기증하였다.
이후 수원시는 해우재를 화장실문화 전시관으로 전환하고, 2012년 화장실문화공원을 개장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해우재는 실내 전시관과 실외 전시관을 통틀어 볼거리가 제법 많아 걷는 이들의 발길을
늦출만한 장소다.
또한 해우재를 빠져나오면 물레방아라는 식당이 있어 걷는 시간에 따라 식사를 하기도 좋다.
삼남길 서호천길은 해우재 인근에서 길이 두 개로 나뉜다.
원래 잡아놓았던 코스에 공사 구간이 생기면서 임시로 길을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임시 구간을 따르면 잠시 도로를 걷다가 흙길에 접어든다.
밤나무가 많았다는 율전동(栗田洞)이다.
지금은 밤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고 경작지를 잇는 길이 이어지는데, 길의 풍경이 묘하게 매력 있다.
수원시라는 작지 않은 도시에 경작지 너머로 아파트가 보이는 장면.
아직은 도시 사람들이 숨통을 틀 수 있는 공간이 남았다는 반가운 소식이기도 하다.
↑ 작은 부분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봄 빛깔은 걷기꾼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다.
조선 정조의 권력이 만들어낸 서호의 아름다움
율전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길을 이으면 작은 공원을 지나 도로를 만난다.
도로에서 길을 건너 왼쪽 방향을 따르면 서호천으로 연결된다.
구간 이름에 명시된 서호천을 드디어 만나는 것이다.
서호천은 생활하수와 각종 오폐수로 오염되던 것을 1998년부터 하천정비사업을 벌여 수질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이후 하천가에 갯버들과 갈대를 심고 산책로를 만드는 등 생태도심하천으로 조성하여 지금은 주민들의 휴식공간
으로 이용되고 있다.
삼남길 서호천 구간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 언덕 위로 정자와 솟대가 보이는데,
지역환경단체 '서호천과 친구들'과 지역주민들에 의해 조성된 서호천 솟대공원이다.
공원으로 올라서면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어 길을 걷는 도중의 좋은 휴식공간이 되어준다.
↑ 삼남길 서호천길 코스에서 들를 수 있는 해우재는 화장실문화에 관한 소소한 볼거리들을 제공해준다.
서호천 산책로에는 벚나무를 비롯한 꽃나무들이 더러 심어져있어 따뜻한 봄날에 더욱 좋은 길로 거듭난다고 한다.
특히 벚꽃이 절정을 이룰 때는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걸을 수 있다하니 봄철 걷기 좋은 코스로 각광받을
수 있겠다.
산책로를 걷고 걷다가 서호공원에 거의 이를 때쯤, 오른편으로 야트막한 산이 하나 보인다.
'아름다운 기생처럼 생긴 산'이라는 뜻을 지닌 여기산(麗妓山)이다.
산길로 삼남길을 연결했어도 좋았을 법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산은 입산이 통제되어 있다.
중백로, 황로 등의 백로과 조류들이 서식하게 되면서 서식환경 보호를 위해 사람의 발걸음을 막은 것이다.
그런 덕분에 이 구간을 지날 때면 서호천 주변을 노니는 백로들의 모습을 볼 수도 있어 길을 걸으며 즐길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다.
서호천을 걸어 서호공원 입구에 도착하면 서호천길의 정식 구간은 마무리된다.
걷기를 끝내려면 화서역 방면으로 빠져나가 전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면 되는데,
호수를 눈앞에 두고 발걸음을 돌리기 아쉽다면 서호공원부터 항미정까지의 삼남길 중복들길의 초반 구간을 더
걸으면 된다.
서호의 동쪽 둘레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따르면 서호천길과는 또다른 풍경을 즐기며 항미정까지 연결된다.
기실 서호는 자연발생적인 호수가 아닌 농업용수 목적으로 만들어진 저수지다.
이는 조선 정조의 효심과 연관이 있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좋은 곳에 쓰려는 의도로 한양과 가까운 길지를 물색했다.
찾아낸 장소가 현재 융건릉이 위치한 옛 수원 자리였고,
이곳에 융건릉을 건립하기 위해 대대적인 이주 정책을 벌인다.
그곳에 살던 백성들을 현재의 수원 자리로 옮기려니 농사를 지을 물이 필요했고,
용수확보를 위해 만든 4개의 인공호수 중 하나가 서호인 것이다.
정식명칭은 축만제(祝萬堤)이나 읍의 서쪽에 위치해 쉽게 서호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의 왕, 특히 정조는 고을 하나를 통째로 옮겨버릴 정도의 권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백성의 삶터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불합리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서호와 함께 둔전(屯田)도 만들었으니 무턱대고 백성들의 먹고 살 길을 없애지는 않은 것으로 해석해야할 것 같다.
↑ 율전동을 지나면 잠시 도로 옆을 걸어 서호천으로 연결해 간다
서호공원 산책로의 끝에 항미정이 있다.
이 정자는 순조 31년(1831) 당시의 화성유수 박기수가 건립한 것이며,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에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목(眉目)"이라 읊은 데에서 따왔다고 한다.
예부터 서호는 낙조가 유명하였는데, 항미정이 이러한 서호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항미정에서 걷기를 끝낼 경우, 다시 서호 산책로를 걸어 화서역 방면으로 가거나 중복들길이 이어지는 천변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편 도로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가면 수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 '화성' 성곽 주변 맛집들
낮에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밤에는 정조의 효심을 느끼다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조선시대 최고 성곽기술이 녹아 있다. 불과 200여년밖에 안 됐지만 성곽의 여러 건축물이 제각각 특별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기행을 떠나보자.
■수원화성, 달빛을 머금다 살펴볼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성곽으로 꼽힌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과학성, 축성에 대한 이야기가 그 매력을 더해준다. 사도세자는 정조의 전 임금인 영조의 둘째 아들로 두 살 때 세자에 책봉됐고 열 살 때 혜빈(혜경궁)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하지만 훗날 왕족의 사주를 받은 신하가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게 되었고 이를 거역한 사도 세자는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 평소 아버지의 죽음을 슬프게 여기던 정조는 부친의 무덤을 경기도 양주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새 무덤 인근에 있던 본래의 수원을 좀 더 북쪽인 팔달산 기슭으로 이전시켜 새 도시를 만들었다.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지점에 행궁을 포함한 새 도시를 건설하는 일인 한편 부친의 넋을 달래려는 효심이 깃든 대역사 (大役事)였던 것. 정조 18년(1794년) 해발 143m의 수원 팔달산을 중심으로 성을 쌓기 시작한 지 2년 반 뒤 총길이 5700m의 성이 완성됐다. 실사구시의 과학정신이 화성 축조에 응용된 것. 화성의 동서남북으로는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이라는 큰 문을 만들었고 그 사이사이에 5개의 암문, 2개의 수문도 두었다. 그 밖에 적대, 공심돈, 봉돈, 장대, 각루, 포루도 만들어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화성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만들어진 도시 성곽으로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성곽을 따라 걷는 동안 조선시대 아름다운 건축미에 흠뻑 빠져들고 건강도 다질 수 있어 화성의 매력을 더해준다. 아울러 곳곳에는 한자가 쓰인 깃발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어 여행객은 잠시 조선시대 군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 기도 한다. 돌아보기가 어렵다면 사대문의 반 정도만 돌아봐도 좋다. 행궁은 임금이 지방 행차 시 머물던 별궁으로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으로 행차할 때 이곳을 자주 임시거처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봉수당, 장락당을 비롯한 총 576칸 규모의 거대한 행궁이다.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모친인 경의왕후(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경로잔치를 여는 등 백성에게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들어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봉수당에 들어서고 경찰서, 학교 등이 차례로 세워지면서 모두 훼손되고 말았다. 이후 1996년 화성 축성 200주년을 맞아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하나로 대대적인 복구사업이 전개돼 일부나마 옛 모습을 갖추게 됐다. 화성행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신풍루 앞에서는 관람객을 위한 다양한 행사가 펼쳐져 볼거리를 제공한다. 장용영은 정조 17년(1793년)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금위조직을 말한다. 이 밖에 화성행궁 토요상설 공연, 무예 24기 공연 등도 마련돼 있어 화성 나들이를 더욱 뜻깊게 한다. 행궁은 매주 월요일에는 휴관하고 정조대왕능행차는 수원화성문화제가 열리는 매년 10월 10일을 전후해 재현된다. 처음에는 보호와 방어라는 성곽의 1차적 용도를 뛰어넘은 우리나라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흠뻑 매료되고, 그다음에는 한 임금의 부모 공경에 감탄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곽 트레킹으로 자신의 건강을 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매력이다. 또한 웅장함과 화려함, 실용성을 두루 갖춘 화성의 야경 역시 일품으로 다가온다.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성곽 주변 맛집들
↑ [조선닷컴]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 ↑ [조선닷컴]남수동과 팔달로 일대에는 크고 작은 통닭집들이 몰려있다 ↑ [조선닷컴]수원을 대표할 만한 분식집인 <보용만두>와 <보영만두> ↑ [조선닷컴]만두와 쫄면이 맛있는 보용만두와 보영만두 ↑ [조선닷컴]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40년 전통의 대왕칼국수 ↑ [조선닷컴]여름에만 제공되는 콩국수는 진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계획 도시로서 개혁적 통치자인 정조와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의 열정이 살아 숨쉬는 조선 후기 토목 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특히 1997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한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그렇다면 '백문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성곽으로 전해지는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면서 역사의 숨결을 느껴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팔달문'에서 '장안문' 방향으로 조금 걷다보면 그 유명한 통닭 골목이 나온다. 팔달로와 남수동을 사이에 두고 많은 집들이 성업 중이다. 그 중에 조그만 골목 사거리에 이른바 필자가 재미삼아 사대천왕이라 칭했던 집들이 있다. <진미> 는 닭모래집을 통닭이랑 섞어서 내주고, <장안>은 튀긴 마늘과 닭모래집을 섞어서 따로 접시에 담아 내주며, <용성>은 닭모래집 튀김과 닭발 튀김을 서비스로 내준다. 후발주자인 <치킨타운>은 닭모래집만 튀겨서 제공하는데 각기 개성이 있어서 충성도 높은 단골 고객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다. 그 외에도 수원천을 따라 <남수통닭>을 비롯해서 전통의 <매향통닭> 까지 많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맥주 한잔하는 것도 무척이나 낭만적이다. 통닭에 맥주보다는 소주 한잔에 고소한 불맛이 그립다면 같은 골목 안에 있는 <입주집>도 주목할 만하다. 지글거리는 소곱창의 고소한 내음이 가는 이의 발걸음을 잡는다. 바로 <보용만두>와 <보영만두> 인데, 말 그대로 만두가 전문인 분식집인데 분식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대부분의 음식이 갖춰져 있다고 보면 된다. 두 집에 얽힌 사연을 놓고 누가 원조니, 어디가 더 맛있다느니 하면서 갑론을박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자리에 먼저 있었던 집은 <보용만두>이다. <보영만두>가 나중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두 집 다 만두와 쫄면으로 유명한데 경험해본 바로는 우열을 정하기가 쉽지 않은 그야말로 막상막하의 수준이다. 군만두, 김치만두, 찐만두 등이 있는데 매운 쫄면에 잘 어울리는 만두는 아무래도 군만두가 아닌가 싶다. 쫄면 역시도 매운맛, 중간맛, 안매운맛 세 개의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자의 기호에 따라 선택하면 되겠다. 쫄면의 매운 맛이 입안을 얼얼하게 만들 때쯤 그 매운 맛을 군만두로 달래보자. 군만두는 만두피를 두툼하게 만들어서 바삭한 듯하면서도 쫄깃한 맛이 있는데 두툼하고도 쫄깃한 만두가 쫄면의 매운 맛을 신기하게 중화시켜 준다. 군만두에 쫄면을 싸서 먹거나, 매콤한 양념에 찍어서 비빔 스타일로 먹는 재미 또한 별미다. 전체적으로 2천원에서 최고 비싼 메뉴가 5천원 정도로 부담없는 가격 또한 이곳을 자주 찾게되는 이유다. 바로 <춘천막국수> 인데 얼핏봐서는 영업을 하는 집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하다. 주차할 공간도 마땅치 않다. 그런데 문을 열어보면 어디서들 몰려왔는지 많은 손님들로 북적인다. 흔히 먹는 막국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쫄깃한 면발에 간장 양념장에 비벼먹는 그런 막국수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확실한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이곳 수원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성지와도 같은 곳으로 저마다 이집에 대한 한가지씩의 추억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허름한 골목길 안에 들어있는 대왕칼국수는 매일 손반죽을 하고 밀대로 직접 밀어서 끓여내는 손칼국수로 유명한 곳인데 칠순을 훌쩍 넘기신 어르신께서 90도 가깝게 굽어진 허리를 하고 지금도 주방에서 일을 하신다. 마치 그 옛날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 가슴 한켠에는 무언지 모를 뭉클함이 일어난다. '보통', '중특', '특상' '곱배기' 라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특'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은 날계란이 한 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이나 날계란이 들어간 '특' 칼국수나 가격이 같다. 거기에 혼자서 한 그릇을 비우기가 부담스러울 만큼의 양을 담아주면서 가격은 4천원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여름철에는 콩국수가 가능하다. 아침 내 내 갈아두었다가 살얼음이 생기도록 준비해둔 콩국물은 비리지 않고 진하면서 고소하다. 여기에도 역시 차고 넘칠 정도로 푸짐한 양의 칼국수가 들어가는데 어떤 손님들은 국수는 건져내고 콩국만 시원하게 한 사발 들이키기도 한다. 역시 4천원이라는 가격은 고마우면서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한 조치로서 대형마트 휴일제를 실시하고 있다지만 실제 그 효과가 재래시장으로 연결되지 않는 점은 유감이다. 아무튼 <지동시장> 안에는 전국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순대 타운' 이 형성되어 있다. 얼큰한 순댓국 한 그릇도 좋고, 철판볶음을 주문해서 각종 채소와 순대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소주 한 잔 곁들여 보는 것도 쌓인 피로를 날려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수원 화성의 축성 이념인 이 글귀에는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이상과 꿈이 잘 담겨 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왕세자의 산소)을 경기 양주 배봉산에서 지금의 수원 화산으로
1997년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당시 수원 화성을 찾은 한 문화재 심사위원은 "역사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과학정신과 함께 아버지를 향한 한 임금의 애틋한 효심이 서려있는 수원 화성으로 역사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 자리한 수원 화성(사적 3호)은 정조의 애민하는 마음과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법을
정조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다.
■실사구시의 정신이 깃든 '화성'
성을 쌓기 위해 정약용은 영의정 채제공의 총감독 아래 거중기(擧重機)를 고안해냈다.
수원 화성은 총길이 5.7㎞, 면적 37만1145㎡(약 11만2400평)에 4대문 등 51개 시설로 이뤄져 있다. 이를 모두
서장대와 화서문 중간에는 정조대왕의 동상이 서있고 그 아래쪽에는 최근 복원한 화성행궁이 있다.
■관람객을 위한 행사 다양
봉수당에서는 정조대왕과 왕비가 경의왕후에게 회갑연을 베풀어드리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3월부터 11월까지 매주 일요일(오후 2~3시)에는 장용영(壯勇營) 수위식이 열린다.
화성을 돌아보는 동안 최소한 세 번은 반하게 된다.
충분히 걷고 보았다면 이제 먹는 즐거움이 빠지면 서운하겠다.
<진미통닭>, <용성통닭>, <장안통닭>, <치킨타운> 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뿐만 아니라 화성의 4대문 중 정문이라 볼 수 있는 '장안문' 로타리에 수원을 대표할 만한 분식집이 있다.
만두 전문 분식집답게 여러 가지 종류의 만두가 있다.
그리고 팔달문에서 인쇄골목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제법 내공있어 보이는 노포를 만날 수 있다.
북수동에 위치한 노포 <대왕칼국수>도 주목할 만하다.
여기 메뉴는 참 재미있다.
또 성곽 아래 <영동시장> 과 <지동시장>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통닭골목>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1가 50
- <보용만두>와 <보영만두>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282-2
- <춘천막국수> 수원시 팔달구 교동 23 031) 242-6667
- <대왕칼국수>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311번지 14호 031) 252-2820
글·사진 김인규(아포리아) 맛집블로거www.cozy95.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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