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밝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해망동 골목을 서성이다...
일제의 수탈이 한창이던 시절에 이곳에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한 창고가 있었는데,
그 창고는6·25전쟁 때는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이 일대가 피난민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1960~70년대에는 수산업과 합판산업이 크게 발달해서 전국 각지에서 부둣가 노동자와 뱃사람 등이 모여
들어 흥남동·중동과 함께 군산의3대 동(洞)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 시절 해망동은 전성기를 맞아서"하늘은 밤인데 바다는 훤한 대낮"을 뜻하는 천야해일(天夜海日)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나1990년 금강하구둑이 완공되면서 군산 내항이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설상가상 합판산업의 주도권이 동남아시아로 이동하면서 해망동은 서서히 힘을 잃고 쇠락한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2006년 해망동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추진되었고,낡고 쇠락한 달동네는 공공미술과 어울려 예술
적인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해망굴을 통과해서 월명동으로 향했다.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적산(1945년8·15광복 이전까지 한국 내에 있던 일제나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광복
후에 이르는 말)
가옥도 많이 남아 있어서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군산의 명물인 철길마을을 돌아보고 싶었다.
월명동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었더니 군산 내항이 나왔고,중앙동을 따라 철길이 길게 이어졌다.
2. 두물머리의 새벽빛과 운길산 수종사의 안개 속을 거닐다...
흐르는 강물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고,
그 강을 둘러싼 산세가 정겨워 언제부터인지 가슴이 답답하거나 가볍게 드라이브를 하고 싶을 때
찾는 단골장소가 되었다.
두물머리의 풍경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단지 수백 년 된 한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가 우뚝 서서 큰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다.
작은 돛단배 한 척, 솔섬 하나, 잔잔한 강물과 연밭,병풍처럼 둘러쳐진 부드러운 산세가 고요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과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그 수수한 아름다움이 이곳을 찾은 도시인들에게 부담 없는 편안함으로
다가가는 듯하다.
♠운길산과 수종사가 만들어 낸 고즈넉한 풍경화
운길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 나왔다.
급한 경사길을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다가 중간쯤에서 차를 멈췄다.
새벽의 평화로움을 깨기 싫었고, 이런 자연 속 산사를 찾아가는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히 자연을 느끼고
호흡하며 걸어야 제맛이지 않겠는가.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햇살은 비추지 않았고,산속에는 짙은 안개로 인해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려 있었다.
조심조심 내딛는 발길 앞으로 구불구불 나 있는 작은 길만이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수종사는 해발 610여m의 운길산8부 능선쯤에 위치한다.
마치 속세를 벗어난 진정한 수도승처럼 세상을 발아래 두고 청정한 운길산의 자연과 고요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수종사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양수리는 속세와는 작별한 듯 새하얀 안개 속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안개 걷힌 맑은 날이면 산 아래로 양수리의 아름다운 풍광이 드러났을 테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좀체
안개가 사라지지 않았다.
# 먹어 보기
수종사 다실에서 멀리 남한강을 바라보며 음미하는 녹차 한 잔은 필수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조안면 경찰서 옆에 있는'기왓집 순두부'(031-575-9009)에서 담백한 순두부나 고소한
콩비지찌개에 금방 버무려 주는 배추 겉절이를 먹으면 얼굴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그 옆 넓은 한옥 커피점인'고당'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진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나들이가 된다.
만약 기왓집 순두부와 고당을 놓쳤다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 아쉬움을 달래 줄 퓨전 한정식 레스토랑'하늘정원'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504-16, 031-521-7777)이 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
롯데호텔 조리장을 역임한 주인장이 엄선한 재료와 특별한 솜씨로 이루어진 퓨전 한정식,
강이 보이는 예쁜 정원에서의 차 한 잔은 행복한 여유를 선사해 준다.
3. 바다와 사람, 자연이 어우러진 포구로 떠나다
인천광역시 소래포구 & 소래습지 생태공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이곳에 전국 제일의 염전인 소래염전이 들어섰다.
일제는 전쟁에 쓸 화약 원료인 양질의 소금을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건설했고,
이때부터 소래포구 역사의 서막이 열렸다.
1937년 8월, 소금과 미곡 수송 그리고 인천 시민들의 이동을 목적으로 수원과 남인천을 잇는
52km의 수인선이 개통되었다.
수인선은 궤간 너비가 1.435m보다 좁은 협궤 철로여서 협궤용 증기기관차가 운행되었다.
이 증기기관차는 1978년까지 운행되다가 이후 디젤 동력기관차로 바뀌어서 1995년 12월 31일까지 운행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함께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협궤용 증기기관차는 이제 소래포구 옆 작은
공원에서 편안한 휴식을 누리고 있다.
그 오랜 세월 바다 위로 외롭게 뻗어 있던 협궤는 열차가 운행을 멈춘 후 소래포구로 들어가는 철교다리가 되었다.
이제는 이곳을 찾는 누구나 철교를 따라 걸으며 소래포구의 정겨운 풍경과 햇살에 반짝이는 서해를 바라본다.
이 철교다리는 노후로 인한 안전상의 문제와 새로운 다리 건설로 인해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인도교로 재탄생하였다.
어느새 포구 맞은편까지 아파트 군단이 점령해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옛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포구의
어시장과 철교 밑을 오가는 어선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아련한 향수에 젖어든다.
소래포구는 일제 강점기 때 염전 인부를 실은 한 척의 나룻배가 들어오면서부터 포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60년대 전쟁 실향민들이 모여들어 피양촌을 형성하였고 무동력선 1~2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들은 열악한 형편 때문에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겨우 가까운 바다에서 작은 새우를 잡아 새우젓을 만들었다.
이들은 새벽 일찍 수인선 철도를 타고 인천, 부평, 서울 등지로 새우젓을 이고 나가 팔아서 삶의 기반을 잡아 갔다.
마침내 동력선이 도입된 1970년대 초가 되어서야 소래포구는 어촌으로서의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연간 1천만 명이 찾아오는 전국적인 명성의 어시장이자 관광명소가 되었으니 새삼 역사의 변화무쌍
함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도 포구에는 수시로 배가 드나들고, 어선을 따라 갈매기들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소래포구의 젓갈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서 김장철이면 이곳 젓갈을 사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자연 생태의 보고, 소래습지
왁자한 소래포구 어시장에서 벗어나 10여 분만 걸으면 소래습지 생태공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소래염전이 있던 곳으로 1996년까지 천일염이 생산되었다.
염전 너머로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들어와 갯벌을 이루었고, 생산된 천일염을 나르기 위하여 배가 들나들었다.
지금은 갯벌과 폐염전을 다양한 생물 군락지 및 철새 도래지로 복원시키기 위해 공원으로 조성했다.
습지 내 각종 해양생물을 관찰하고, 천일염을 생산했던 시설물과 자료를 볼 수 있는 생태 전시관,
철새를 관찰하는 조류 관찰대, 천일염 생산을 관찰하고 체험할 수 있는 꽤 넓은 규모의 염전,
습지 내에 사는 다양한 동식물을 탐구할 수 있는 자연 학습장 등으로 꾸며져 있다.
눈을 돌려서 광활한 갯벌을 따라 풍성히 뻗어 있는 갈대밭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스럽게 뚫린다.
그 갈대밭 사이를 유유히 거닐다 보면 눈앞으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고풍스러운 풍차 3동이 벌판 위에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다.
짙은 고동색 몸체에 새빨간 지붕과 날개가 있는 풍차는 드넓은 갯벌에서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치 벨기에의 작은 마을 브뤼게에서 만났던 소박한 풍차처럼 앙증맞게 서 있다.
아기자기한 브뤼게 구시가지를 벗어나 조금 한적한 길을 걷다 보면 작은 풀밭 위에 조용히 서 있는 풍차를 볼 수 있다.
흐린 빗속에서 마주한 브뤼게의 풍차가 수줍은 소녀의 감성을 지녔다면 소래포구의 풍차는 방긋 웃는 소년을 떠올리게 한다.
서로 닮은 두 풍경이 주는 다른 감성이 재미있다.
잠시 풍차를 마주보고 서 있으면 한적한 브뤼게의 풍차들이 모여 있던 풀밭에 서 있는 느낌이다.
도시인들이 모여 사는 회색빛 아파트 군단은 어느새 멀찍이 물러섰고, 눈앞에는 갯벌 한가운데로 쭈욱 뻗어 있는
황톳길과 습지 식물 그리고 도시를 피해 찾아든 철새가 보일 뿐이다.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드넓은 갯벌 속 자연이 만든 흙길을 따라 걸을수록 마음이 유쾌해진다.
갯벌 근처, 그물을 깃는 어부의 익숙한 손놀림 속에서 소래포구와 함께 살아온 그의 연륜이 묻어났다.
어시장의 활기와 포구의 정겨움, 생태공원의 소금기 어린 바람, 마치 낯선 이국땅을 배회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풍차가
있는 곳, 소래포구.
잠시나마 그곳에 머무르면 온몸이 바다와 바람이 주는 에너지로 가득 채워진다.
그리고 다시금 삶의 터전으로 기꺼이 돌아갈 힘을 얻게 된다.
도시의 삶에 지칠 때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소래포구는 어쩌면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도시인들의 피난처인지도
모르겠다.
# 먹어 보기
어시장에서 횟감을 사면 제휴 식당을 안내해 준다.
인당 약간의 양념비(자릿세)를 내면 사 간 횟감을 손질해 주어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으며
약간의 돈을 더 내면 매운탕도 끓여 준다.
시장 주변에서 파는 새우튀김 등 각종 튀김이나 꽁치구이를 사 먹는 것도 재미있다.
물론 싱싱한 조개구이나 해물칼국수 집도 즐비하니 골라서 먹자.
4. 시간이 멈춘 골목, 수암골 벽화마을을 가다..
충청북도 청주시 수암골 벽화마을
수암골은 한국사의 비극 속에서 생겨난 곳이다.
피비린내 나는6·25전쟁이 끝난 후 울산의 한 육군병원 앞에 천막을 치고 고달프게 살아가던 피난민들이
청주 우암산 산자락으로 이주하면서 작은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도심과 달리 이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 없이 예전 풍경과 골목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2007년 전까지는 청주 사람들조차 세상에 이런 동네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소외된 마을이었다.
2007년 이후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업이 추진되어 충북 민족미술인협회와 민예총의 작가들, 청주대학교, 서원
대학교 학생들이 협력해서'추억의 골목여행'이라는 주제로 서민들의 일상을 담은 벽화를 수암골 곳곳에 그렸다.
회색빛으로 음울하던 골목길은 온갖 다채롭고 재기발랄한 그림들로 가득 채워졌다.
파란 페인트로 칠해진 간판에는 투박한 글씨체로 삼충상회가 적혀 있다.
그 옆 수도관에 방치된 화분에도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수암골의 유일한 가게이자 동네 어른들의 사랑방이다.
이제는 익숙한 듯 카메라를 둘러멘 내 모습도 그저 무심히 바라본다.
감이 다 떨어진 한겨울인데도 감나무 아래 담벽에는 주홍빛 감이 수북히 열린 감나무가 있다.
삼충상회 담벼락에는 숨바꼭질 술래가 된 소녀가'꼭꼭 숨어라.머리카락 보인다!'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술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소녀를 뒤로하고 살금살금 걸었다.
한때 이 달동네에서 자취를 하며 작가의 삶을 꿈꿨던 솔뫼라는 이는 그 벽에다 낙서처럼 시를 남겼다.
그는 수암골의 'ㅁ자 집마당에 이어달리기로 꽃이 피던' 자취집 달방을 깊은 산속 암자인 양 오세암이라 불렀다.
그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이어달리기로 꽃이 피던 이 달방에서의 치열한 삶을 회한처럼 돌아본다.
골목마다 이렇고 저런 삶의 사연이 가득하다.
동네 위쪽에 있던 수암상회는 이제는 지붕도 무너지고 주인은 떠나 버린 폐허가 되었다.
벽화만이 과거에 이곳이 수암상회였다는 기억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곳곳에 무심히 지나치면 놓칠지도 모르는 그림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숨어 있다.
작은 샛길 한 곳에는 길게 피아노 건반을 그려 놓았다.
그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면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연주가 울려 퍼진다.
시외버스터미널 뒤쪽의 '도토리고을'에서 도토리묵과 쟁반국수 등이 나오는 도토리정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벽화마을 입구 '삼충상회'나 그 맞은편 '먹거리 마당'에서 예쁜 골목을 내어 주는 주민을 위한 감사의 마음으로
간단한 간식도 사 먹는다.
수암골에서 6km떨어져 있는 분평동의 '순호황토마을'은 신선한 생고기와 음식궁합이 맞는 맛 좋은 반찬을 내 준다.
바로 가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생각에 부랴부랴 북촌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왜 새삼스레 새해 첫날 아침에 북촌이 마음에 떠올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가끔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유 없이 하는 행동이나 말이 얼마나 많은가.
그저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가면 되는 것 아니겠나.
오밀조밀 낮은 지붕 아래에 이어진 아기자기한 가게를 지나서 얼마 걷지 않아 북촌문화센터가 나타났다.
열린 대문으로 조심스레 들어서자 분주했던 도시의 소음은 잦아들고 고즈넉한 한옥의 운치가 감돌았다.
한 바퀴 휘둘러보고 다시 계동길을 걷자니 한옥의 한쪽 굴뚝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회박물관이 있는 가회동11번지 골목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도깨비처럼 N타워가 삐죽 솟은 남산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한옥의 처마 사이로 비치는 도시의 풍경은 뭔가 낯설고 어색했다.
그에 반해 부드러운 곡선의 한옥이 만든 길과 골목에는 정겨운 그리움 같은 것이 있었다.
시멘트 건물 속에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이곳이 소중한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유산이 현재 속에 공존할 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한 시간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여행이 이리도 간단할 수 있음을 북촌 한옥마을의 소박한 길을 걸으며 몸으로 느꼈다.
계동의 한적한 골목길 중간 다세대주택1층에 자리 잡은 작은 레스토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특별히 눈에 띄는 간판도 없고 연한 파랑색으로 칠해진 입구에는 작은 사다리가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부의 소품이나 조명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소박한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자칫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한옥마을 북촌의 한적한 골목에는 새로운 맛과 멋을 지닌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6. 간월도, 마음의 달이 차오르는 섬으로 가다
간월암(看月庵)은 마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있는 몽생미셸 수도원처럼 썰물 때는 육지였다가 밀물 때는
섬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규모가 거대한 몽생미셸과 달리 간월암은 마치 은둔한 학처럼 서산 앞바다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고려 말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바다 위로 홀연히 떠오른 달을 보고 문득 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그래서 암자 이름을 간월암이라 칭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이 폐사되어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1941년에 와서야 만공선사에 의해 새롭게 중창되어 오늘에 이른다.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렸고 결국 감격스러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은 섬 위에 세워진 암자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온 녹록지 않은 사연과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고
바다는 그저 묵묵히 간월암으로 향하는 속세의 사람들을 맞아 주었다.
암자에서 나와 간월암을 뒤로하고 물이 빠진 바다를 걸었다.
돌아서서 바라보니 마치 순례자처럼 수많은 사람이 줄지어서 바닷길을 걸어 간월암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옛날 프랑스 몽생미셸 수도원을 찾던 수도사들은 밀물과 썰물의 시간대를 잘 알지 못한 채 바닷길을 건넜다가
갑자기 들이찬 밀물로 인해 많은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로 닮아 있는 풍경이 주는 특별한 감상에 마냥 마음이 떨리고 걸음걸음이 더뎌졌다.
해미읍성,
느긋하게 성벽을 밟으며 걸었다.
성벽 안쪽은 수백 년 전의 과거가,성벽 바깥은 차량 소음이 요란한 현대가 공존하며 나란히 평행선을 이루었다.
여행길을 걷는 것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그 미묘한 경계를 걷는 즐거움은 여행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고, 일상에 파묻혀 살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관점이다.
# 먹어 보기
포구 주변에는 특히 굴밥집이 많다.
청정해역인 천수만 간월도에서 채취한 탄력 있는 굴 맛을 느껴 보지 않는다면 무척 서운할 것이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진상품으로 보냈다는 어리굴젓, 굴회, 굴물회, 굴파전, 굴밥 등 다양한 굴 요리가
있으나 영양굴밥이 필수 메뉴이다.
큰마을 굴밥집, 맛동산 등 유명 굴밥집에서 굴과 함께 호두, 콩, 밤, 대추 등을 넣어 지은 밥에 청국장, 누룽지를
포함한 영양굴밥 정식을 먹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굴밥은 청국장보다 간장이 더 잘 어울리는 듯하여 영양굴밥에 양념간장을 넣어 쓱쓱 비빈 후 구운 김에
싸 먹는데 그 맛이 기막히다.
영양밥을 다 먹을 때쯤 나오는 누룽지에 매콤한 어리굴젓을 올려 먹으면 식사를 환상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7. 흰눈으로 뒤덮인 도솔산의 동백꽃을 그리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들려고 작정한 듯 하늘은 거센 눈발을 계속 쏟아 부었다.
선운사로 향하는 길, 솜털 같은 눈이 한때는 황금빛이었던 들녘을 뒤덮고, 양털 같은 흰구름떼가 하늘을 수놓았다
선운사로 향하는 가로수길은 온통 눈꽃이 가득 피었다.
환한 눈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사각사각 눈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어디선가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려 옆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개울은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눈길 위에는 짐승의 발자국이 남아 고요한 산속 삶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했다는
첫 번째 설의 가능성은 희박하고, 두번째 설인 검단선사 창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연못이었는데 검단선사가 절을 짓기 위해 용을 쫓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용의 원한 때문인지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우연히 연못에 숯을 한 가마니씩 갖다 부으니 눈병이 씻은 듯이 나아서, 이를 기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와서 붓고 나자 큰 못이 금세 메워졌다.
그 자리에 창건한 절이 바로 선운사이다.
검단선사는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운사의 하늘 위로 아름다운 구름들이 계속해서 흘렀다.
마당 한가운데에 세워진 만세루(萬歲樓)는 그 이름처럼 오랜 세월 속에 낡은 기둥을 드러냈고,
만세루 뒤편 대웅전도 연륜이 묻어났다.
빛바랜 단청의 색채는 화려함을 벗어 버리고 소박해서 더욱 아름다웠다.
만세루의 나무들보와 곡선의 나무지붕들은 각진 현대의 건물들과는 다른 부드러움으로 여행자의 시선을 받아 주었다.
한참을 걸었을 무렵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머물렀다는 진흥굴이 나타났다.
한 나라의 왕이 왕위를 버리고 이렇게 깊은 숲 속 굴에 기거했다는 설화는 믿기 어려웠지만,
세상에는 믿기 어려운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면 믿지 못할 이유도 없다.
진흥굴에 이르는 돌계단길은 유난히 길어 보였고 마치 그 계단을 걸어 굴속으로 들어가면 세상과는
작별해야 할 것만 같았다.
입구에서 기웃거리며 주저하다가 다시 돌계단을 내려와서 도솔암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온통 설산에 둘러싸인 도솔암은 말 그대로 신비로운 선경이었다.
도솔암 마당에서 바라본 눈 쌓인 산세도 감탄사를 토해 내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간판 풍천장어집.
하지만 진정한 풍천장어를 여기서 맛보자.
선운사 가는 길과 앞에도 장어집이 많은데 '명가풍천장어'를 비롯해 복분자양파장아찌, 뽕잎 장아찌가 나오는
'청림정금자할매 풍천장어'( 선운사 앞은 2호점이고 할머니가 계신 1호점은 반안리에 있다.)도 있다.
대부분의 장어집이 밑반찬 종류는 푸짐하지 않으니 주 메뉴인 풍천장어의 맛을 충분히 즐기자.
바닷가가 코앞인 고창은 백합(조개 종류)도 유명하니 백합전골, 백합회무침, 백합죽 등 백합요리를 맛보자.
백합회무침이 유명한 '호수가든'에서 새콤달콤한 회무침을 먹으며 밥 한 공기를 주문하면 비벼 먹을 수 있게
큰 그릇에 밥, 김, 양념 등이 함께 나오니 백합회비빔밥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바지락 비빔밥도 아무데서나 맛볼 수 없는 이색 메뉴이다.
8. 드넓은 벌판, 그 치유의 공간 위에 서다
![](https://m1.daumcdn.net/thumb/T430x0ht.u/?fname=http://i2.media.daumcdn.net/photo-media/201301/25/mediadaum/20130125151714612.jpg)
창밖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있다 보니 어느새 양떼목장 초입이다.
겨우내 쏟아진 폭설로 인해 대관령은 온통 눈세상이다.
길 양쪽으로 쌓인 눈높이는 어른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쭉쭉 뻗은 침엽수들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새하얀 눈옷을 입고 동화 속 겨울 풍경을 만들어 냈다.
한 걸음 잘못 내딛으면 무릎까지 푹푹 빠져들었다.
그래도 여행자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다.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어느 나무에서 눈이 푸드덕거리며 쏟아졌다.
양지 바른 곳에 가지런히 널린 황태들은 태양빛을 머금어 새하얀 눈빛 속에서 황금빛을 냈다.
자연이 만들어 낸 하모니에 취해 걷다 보니 양떼목장에 들어섰다.
양떼보다 더 새하얀 눈이 언덕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온통 하얀 세상 속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하고 맑아졌다.
산책로를 따라 크게 원을 그리며 터벅터벅 걸었다.
산책로를 내려오다가 올려다 보니 앙상한 겨울나무와 나무로 지은 움막이 둥근 언덕에 풍경화가 되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 먹어 보기
대관령 양떼목장이 있는 횡계는 동해가 가까워 오징어나 황태를 이용한 음식이 유명하다.
겨울에 대관령 양떼목장에서 맞는 바람은 코를 빨갛게 얼리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차갑지만 그 바람에
우리가 제대로 맛이 든 황태를 맛볼 수 있다.
횡계IC근처나 용평스키장 입구 주변에 황태 전문 음식점이 많으니 황태구이,황태찜,황태국 등 다양한 황태요리를 맛보자.
맑은 국물로 속이 확 풀어지는 황태국이 맛있는'황태촌'과'황태회관',싱싱한 오징어로 만들어 정말 쫄깃한 오삼불고기가
자랑인'도암식당'등이 맛집으로 칭송받고 있다.
바다뿐 아니라 푸른 초원이 있으므로 한우고기 맛도 빼놓으면 아쉽다.
'대관령 한우타운'은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서 고기 굽는 값을 내고 먹는 시스템이다.
믿을 수 있는 우리 한우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는 기회도 놓치지 말자.
9. 창녕 우포늪, 그 원시의 시간 속으로 가다
1997년 생태 경관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3월 습지의 보호와 지속 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인
람사르 협약(Ramsar Convention)에 등록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여름철 장마가 질 때면 넓이2,313km2의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늪지가 된다.
수많은 동식물이 이곳을 서식처로 삼고 살아간다.
우포는 동 트기 전 새벽 무렵에 가야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벽녘 우포가 보여 준 경이로운 푸른 색채는 원시의 장엄함과 숭고함이 담겨 있어 절로 우러러보게 만든다.
하늘도,늪지의 물도,나무도,풀도 모두 푸르다. 발길을 향하는 곳마다 푸르른 원시의 빛이 가득하다.
소목 근처에서 우포늪을 바라보니 첩첩산들이 우포를 다정히 둘러싸고 있었다.
산과 산 틈새로,늪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물안개가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늪의 물은 마치 커다란 거울인 듯 경계의 나무를 그대로 표면에 그려 냈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칠 수 없을 만큼 숨막히는 아름다움이었다.
어느새 동쪽 하늘이 밝아지더니 붉은빛이 산등성이 위로 번져 나갔다.
그 빛이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고 파란빛을 걷어 낼 무렵 늪지의 나무와 풀은 비로소 초록의 빛깔을 찾았다.
우포늪이 매력적인 건 바로 그런 자연의 색채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태양도 멀찌감치 물러나서 그를 지켜보았다.늪은 여전히 잔잔했고,시간이 멈춘 것도 같았다.
그물을 걷어 올리는 그가 없었다면 마치 늪 위를 흐르는 바람도,시간도 모두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갑자기 태양빛에 반짝거리던 늪이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변했다.
# 먹어 보기
말흘리에 있는'장마을'은 장맛이 유명하며 청국장이나 송이된장찌개가 정겨운 시골맛을 선사한다.
영산면에 있는 '도리원'의 약초 장아찌와 산채나물이 입맛을 잡아 줄 것이다.
10. 안동 하회마을, 시간을 거슬러 전통을 마주하다
하회(河回)마을의 동쪽으로는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271m의 화산이 있고,이 화산의 줄기가 낮게
구릉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마을이 둥글게 형성되어 있다.
풍산 류씨가 600여 년 동안 대대손손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집성촌이자 기와집과 초가가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도
온전하게 보존된 곳이다.
조선 시대의 유학자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에서는 서민들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지금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하회마을에 보관된 하회탈과 병산탈,《징비록》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다양한 유·무형의 유산들이 보물, 중요민속자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2010년 유네스코는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34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하회마을을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구한말까지만 해도350여 호가 살았던 부락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오늘날은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앞 강변을 따라 수백 그루의 노송 군락이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었다.
굵은 소나무마다 저마다의 역사가 깃들어 있고,가지 사이를 지나는 바람마다 오랜 이야기와 전설이 담겨 있었다.
그 솔밭에서 강을 바라보았다.
가을이라 줄어든 물줄기는 유유히 모래사장 위에 펼쳐졌고, 그 너머로 해발64m나 되는 높은 절벽, 부용대(芙蓉臺)가
마치 스위스 융프라우의 아이거 북벽처럼 가파른 수직으로 우뚝 솟았다.
부용은 연꽃을 뜻하며 예전에는 '북쪽에 있는 언덕'을 뜻하는 북애(北厓)라고 불렸다.
태백산에서 뻗어 온 땅줄기가 화산과 북애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 온 땅줄기가 남산과 부용대를 이루며
만나는 지점에 하회마을이 둥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그 하회를 낙동강이 포근하게 감싸고 돌아가는 형세이다.
지금도 전통 방식으로 가옥이 세워지고 있는 하회마을 곳곳을 거닐다 보면 전통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이 순간순간
마음에 새겨진다.
황토와 자연석을 섞은 토담과 주변의 나무,풍광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기와지붕의 곡선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양지바른 툇마루 위에 매달린 황톳빛 메주와 마루에 깔린 무채는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부드러운 초가집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집도 포근해지고,메주와 무채도 맛있게 영글어 갔다.
♠ 한국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 병산서원
하회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이곳은 본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을1572년(선조5년)에 서애 류성룡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수많은 학자가 배출되었고, 1868년(고종5년)에 내려진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도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곳이다.
무엇보다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만대루(晩對樓)는 병산서원 건축의 백미이다.
200명을 수용하고도 남는 장대한 이 누각은 휴식과 강학의 공간이었다.
누각을 받치고 있는 휘어진 기둥들은 굽이 도는 강물의 형상 그대로이고,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도 정질 한 번 받지 않은 자연 속 돌덩이 그대로이다.
만대루는 두보의 시<백제성루(白帝城樓)>중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취병의만대, 翠屛宜晩對)'에서
따온 이름이다.
말 그대로 만대루 앞을 흐르는 강 너머 깎아지른 절벽인 병산과 마주한 만대루는 자연의 일부인 듯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만대루의 처마는 마치 선녀의 날개처럼 하늘로 날아오른다.
누각 아래 기둥들 사이를 거닐면 어느새 깊은 숲 속의 우람한 나무 사이를 배회하는 듯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먹어 보기
하회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배가 고파 가까운 맛집을 찾게 되는데 이때 하회마을 주차장 주변 장터에서
안동닭찜을 먹어 보자.양도 푸짐하고 맛도 괜찮다.
안동역 앞 음식문화의 거리에 있는'거창숯불갈비'에서는 가격 대비 아주 훌륭한 질의 한우갈비를 먹을 수 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다면 찜갈비의 맵기를 미리 조절해 달라고 한다.
안동 기차역 뒤편 정상동에 있는'신촌닭백숙'의 닭백숙은 청송·안동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음식이니 먹어 본다.
닭다리가 하나만 나오지만 다리가 무척 크고 걸쭉한 국물에 녹두와 찹쌀이 들어 있어 양이 꽤 많다.
닭백숙만으로도 배는 부르지만 이곳에 왔다면 닭불고기도 꼭 맛봐야 한다.
닭고기를 다져서 간장양념에 버무리고 석쇠에 구워 먹는 닭불고기는 너비아니의 닭고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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