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동아시아의 불화, 그 근원은 미국 |

*바다향 2019. 8. 12. 22:53

샌프란시스코 체제 :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 <1>


존 W. 다우어 MIT 명예교수  


다음은 미국의 저명한 일본 역사학자인 존 W. 다우어 MIT 명예교수의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전문 번역한 것이다.

이른바 ‘동아시아 패러독스’,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상호의존이 심화된 동아시아

지역이 군사안보적으로는 가장 취약하며 불안정한 원인은 무엇일까?

다우어 교수는 그 근본 원인을 2차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찾는다. 


전쟁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고 한중일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집단적 평화를 추구했어야 할 샌프

란시스코 평화협상이 미국의 대소, 대중 봉쇄라는 냉전 전략 아래 종속됨으로써 완전한 과거 청산과

진정한 평화 만들기라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히 미국은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을 대소, 대중 봉쇄를 위한 하위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일본의 군

국주의 과거 청산을 도외시한 채 일본의 재무장을 촉구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안보 질서의 불안

정을 초래했다고 다우어 교수는 지적한다.

게다가 일본 군국주의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국과 중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상에서 배제됨으로써

동아시아의 집단적이고 진정한 평화는 애초부터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미 군사력에 바탕을 둔 팍스아메리카나는 동전의 먕면으로서‘평화 지키

기’와 ‘전쟁 만들기’가 동시에 진행됐다는 것이다.


다우어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남긴 8개의 부정적 유산으로

(1)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

(2) 일본과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의 영토분쟁

(3) 일본 내 미군 기지

(4) 일본의 재무장

(5) ‘역사문제들’

(6) (미국의) ‘핵우산’

(7)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로부터의 이탈

(8) 일본의 ‘예속적 독립’ 등을 꼽으면서 이들 부정적 유산이 현재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1965년 미국의 강권에 의해 국교를 회복했고, 중국과 일본은 1971년 닉슨의 전

격적인 대중 화해 덕택에 1972년 관계를 정상화했으나 위에 말한 8개의 부정적 유산, 그리고 각국

의 국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여전히 동아시아 국가들의 집단적 평화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특히 1972년부터 2000년대까지 중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나 영토분쟁은 제쳐둔 채 경제교류를

심화시킴으로써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1990년 이후 일본의 상대적 쇠락과 중국

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2008년 이후 양국 간의 국력 차이가 역전, 심화되면서 중일 간의 대립과 갈등

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중국은 서해와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

자신들의 핵심 국익이 달린 지역에 대한 미 군사력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항모 격침용 탄도미사

일 개발 등 ‘비대칭적 전력’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발흥해 대해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하고, 중국의 ‘지역접근 저지 전략“

을 무력화사키기 위해 ’공해전(Air-Sea Batlle)‘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나아가 갈수록 소진되고 있는 미국의 군사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의 적극적인 안보 기여를 요

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2010년대의 동아시아 지역은 미·일 대 중국의 군사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중국과의 일전을 불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적지

않다.

예컨대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지난 1월 3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내 전략가들 중에는

미·중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크로우 학파’와 미·중 간의 이익을 조화사킬 수 있다는 ‘샹하이 학파’가

있는데, 이중 전자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미국이 중국과의 군사 충돌까지를 상정하고 있지는 분명치 않다면서 미국으로서는 군사충

돌을 피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유지하는 어려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진단했다. (☞ 기사 보기 : ‘군국주의’ 자처하는 아베, 日 국민과 분리 대응해야)


반면 지난해 가을 3개월간 미 하버드대학에 체류하면서 조셉 나이 등 미국의 리버럴 학자들과 대화

를 했던 김영호 전 유한대 총장은 올해 1월 1~3일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

에 대한 미국의 의도를 군사적이라고만 파악하는 것은 일면적이라며 미국에는 자유주의 가치를

으로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지지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편 다우어 교수는 최근 들어 “덜 대결적인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구호로 “권력 분점”

이란 말이 제기되고 있다면서,

“아시아 협조 체제(Concert of Asia)" "태평양 공동체” “팍스 퍼시피카(Pax Pacifica: 팍스 아메리카나

에 반대되는 말)” 등의 구호에서 “권력 분점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권력 분점의 성공 여부는 비정부 민간 네트워크의 확장 여부에 달려있다. 이것

이야말로 진정한 상호의존과 상호 이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기업 간의 촘촘한 그물망은 시

민단체(NGO)와 다국적기업, 그리고 관광과 대중문화와 같은 문화 및 교육 분야의 교류까지를 아우

른다. 이들이야말로 풀뿌리 차원 협력과 통합의 기반이자, 극단적 민족주의와 호전적 대립에 대한

해독제”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이러한 네트워크들은 이미 상당 부분 확립돼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는 어찌하여 이

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극단주의와 비이성의 목소리를 물리치는 데 실패했는가? 그들은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라며 민간 분야 교류를 통해 평화롭고 안정적인 동아시아

신질서를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


이 글을 앞으로 9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이 글은 2013년 1월에 작성된 것으로 올해 1월 일본 NHK 출판 신서로 일역돼 나온 <전환기의 일본:

팍스아메리키나인가? 팍스 아시아인가?>(호주 개번 매코맥 교수와의 공저)의 제1장에 수록돼 있다.

영어 원문은 <재팬 포커스> 2월 24일자에 실려 있다.(☞바로보기) <편집자>


1.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뒤틀린 시작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이름은 1951년 9월 8일 체결된 두 개의 조약에서 명명된 것이다.

이 조약들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하나는 2차대전 때 맞서 싸웠던 일본과 48개 ‘연합국’ 간에 맺어진 다자간 평화조약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 양자 간 안보조약으로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에 “일본 및 인근 지역에

군사력을 보유할” 권리를 허용했으며,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촉구했다.

두 개의 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됐으며 이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이 조약들과 관련해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첫째는 그 시기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될 당시 일본은 미국 점령하에 있었으며, 냉전은 극성기로 치닫고

있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번째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과의 핵무기 경쟁이 시작됐고,

같은 10월 1일에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이어 1950년 2월 14일 중국과 소련이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고, 6월 25일에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즉각 미국이 이끄는 유엔군이 전쟁에 개입했다.

4개월 뒤인 10월 말에는 중국군이 개입했다.

북한군을 물리친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 국경지대까지 밀고 올라오자 중국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낀

것이다.

 6.25전쟁은 1953년 7월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이 전쟁이 교착상태에 있는 동안인 1951년 9월에 (다자간) 평화 및 (미·일) 안보 조약이 체결

됐다.


조약 체결 시기만큼이나 중요하지만 덜 주목받고 있는 사실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의한 평화가 ‘분

평화(separate peace)’라는 점이다.

당연히 강화협상에 참여했어야 할 국가들이 배제됐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의 공산 정권은 물론이고 대만으로 망명한 국민당 정권도 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상에 초

받지 못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이에 이은 미국의 참전(1941년 12월)보다 10년 앞선 1931년 만주사변 이래

국은 일본의 침략과 점령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입은 핵심 당사자라는 점에서 이는 충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도 배제됐다.

한반도 주민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가혹한 식민 지배와 징병, 징용 피해를 입은 당사자

도 말이다.

한편 소련은 강화협상에 참여했지만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

중국 공산 정권이 강화협상에서 배제된 것, 그리고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자국의 냉전

략에 활용한 것 등이 그 이유였다.  


결국 이처럼 주요 당사국들이 배제된 ‘분리된 평화’는 일본을 가장 가까운 이웃국가들인 중국과 한반도

로부터 떼어놓는 배제적 시스템의 단초가 됐다.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 수개월 동안 미국은 일본에 대해 대만의 국민당 정권과 별도

의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그리하여 국민당 정권을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사실상 인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미국의 요구를 듣지 않을 경우 미 의회가 평화조약을 비준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

이 협박이 통하지 않자 미국은 미군의 일본 점령이 무기한 계속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결국

일본은 굴복했다.

1951년 12월 24일의 저 유명한 ‘요시다 각서(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협상의

미국 측 대표인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보낸 서한)’가 그것이다.

결국 1952년 4월 28일 일본과 대만 국민당 정권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그리고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미·일 안보조약이 발효됐다.


1956년 10월 19일, 소련과 일본은 공동성명을 통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하지만 양국은 평화조약을 맺지는 못했으며 소련과 일본 간의 (북방영토 또는 남쿠릴열도의 귀속에

한)영토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맺음으로써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다.

중국과 일본은 1972년 9월 29일의 공동성명을 통해 국교를 회복했으며, 1978년 8월 12일이 돼서야

평화 및 우호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미국의 일본 점령으로 한 편의 일본과 다른 편의 중국 및 한국이 서로 멀어지게 된 것이 가져온

장기적 결과는 매우 유해한 것이었다.

2차 대전 후 유럽에서의 서독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거나

지역공동체를 이룩할 수 없었다. 평

화 만들기가 지연됐던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침략, 그리고 착취가 낳은 쓰라린 상처와 뼈아픈 유산들은 곪아 터질 때까지 방

됐다.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대처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문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표면상 독립국가가 된 일본은 자신의 안보와 국가로서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태평양 너머 미국에 절대

적으로 의존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정적 유산 중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지역 당사국 간의 영토분쟁이다.

다우어 교수에 따르면 이 영토분쟁은 “무관심이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일부로 영토 분쟁의 소지들을 조약

곳곳에 심어 놓았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을 위한 미국의 초기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명기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인 1949년 12월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입장을 바꿨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경 미국의 초안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모두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애매하게 언급했으며, 일본의 영토 범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조약이 체결되기 한 달 전인 1951년 8월,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고

통보했다.


특히 1956년 일본과 소련이 문제의 북방 4개 섬을 각기 2개씩 나눠 갖는 방안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미국은 일본이 북방영토의 일부라도 소련에 양보한다면 오키나와를 미국령으로 만들 것이라고

위협해 평화조약을 무산시킨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영토 분쟁은 지역 국가들의 원만한 화해를 가로막고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편집자>


2. 8개의 부정적 유산들(Problematic Legacies)


1951년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받아들일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보수 정부의 선택은 단순했다.

그것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이론적으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다자간 평화조약 및 일본의 재무장, 미군의 일본 주둔 계속, 그리고 평화조약에서 중국 공산

정권의 배제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의 독립과 미국의 안보 보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야당 세력인 자유주의 및 좌파 세력이 주장했던 모든 나라와의 평화조약 체결 및

일본의 비무장 중도노선 견지였다.

(미소가 대치하는) 냉전 상황 하에서의 중도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아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본의 독립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었고, 미군의 점령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시다의 강력한 우군인 일본의 친미반공세력들조차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특

히 일본 경제계에서는 중국 공산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고립시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미 군정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 전역에 얼마나 많은 미군 부대들이 남아있을지에 대해서도 우려가 있었다.

나아가 일본이 조속히 재무장해야 한다는 워싱턴의 요구에 대해서는 근시안적이며 어리석은 결정이라

는 의견이 많았다.


요시다를 비롯한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의 때 이른 재무장이 국내는 물론이고 과거 일본 침략의 피해를

입은 국가들로부터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대부분의 국민들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이에 따른 국권의 회

을 환영했다.

아가 미국과 일본의 주류세력은 이 같은 냉전질서의 수립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체제는 일본의 과거 청산을 면제해 준 관대한 처분이었기 때문이다.

아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일 안보 관계는 일본의 전략 및 외교 정책의 초석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체제 아래에서 일본은 민주적이고 평화로우며 번영하는 국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한없는 축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이 체제는 일본에 일정한 정책들을 강요하는 구속복(straitjacket)이 됐다.

그리고 그 정책들은 이후 세월이 지날수록 여러 가지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축복’과 ‘구속복’은 양립할 수 있다.

이 둘이 공존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그 시작부터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잉태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정적 유산으로는 다음 8가지를 들 수 있다. 

(1)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

(2)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의 영토분쟁

(3) 일본 내 미군 기지

(4) 일본의 재무장

(5) ‘역사문제들’

(6) ‘핵우산’ (

7)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로부터의 이탈

(8) 일본의 ‘예속적 독립’


(1)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


2차 대전과 초기 냉전이 빚은 비극적 유산 중 하나는 한반도, 베트남, 독일, 중국 등 분단국가의

생성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일본을 2개의 지역으로 분리시켰다.


류큐 열도(琉球列島)의 남쪽 끝 오키나와(沖繩島) 현을 일본의 다른 지역과 분리해 미군의 요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는 다른 분단국가들만큼의 비극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화는 일본 중앙정부와 미국 간의 유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미국이 보기에 오키나와는 2차 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미국의 군사력을 아시아에 투사할 수 있는

‘발진기지’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관점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 중국의 공산화,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더욱

강화됐다.


한편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오키나와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흥정카드였다.

샌프란시스코 협상이 열리기 이전부터 이미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일본의 주권 회복을 앞당길

수만 있다오키나와를 포기하겠다는 제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일의 정책과 관점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공식화됐다.

키나와는 ‘관대한’ 평화 조건에서 예외로 규정된 것이다.


오키나와는 미국의 행정권 아래 들어갔다.

6.25전쟁 동안 오키나와의 카데나 미 공군기지는 한반도 공습을 위한 B-29 폭격기의(수년 전만

해도 일본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발진기지로 활용됐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오키나와는 북베트남에 대한 괴멸적 공습, 그리고 캄보디아 및 라오스에

대한 비밀 공습의 발진기지였다.


1972년, 27년간의 미군 지배 이후 오키나와의 행정권은 일본에 반환됐다.

그러나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진 군사기지로서 오키나와의 역할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2개의 일본’ 정책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는 다층적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군사기지가 초래할 가장 부정적 유산은 미군 병사들의 범죄, 소음 공해, 그리고

환경파괴 등이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본 및 미국 정부의 불투명한 행정, 이중성, 그리고 위선 등도 제도화가 됐을

정도로 만연해 있다.

오키나와 땅에 핵무기, 그리고 고엽제와 같은 화학무기들을 비밀리에 저장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자국의 영토 일부를 외국의 거대 군사기지로 내준 동시에

그곳 주민들을 이등 국민으로 취급한 일본 정부의 뻔뻔스러움이다.


(2) 미해결 영토 분쟁


현재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 간의 관계를 훼손시키고 있는 5개의 영토분쟁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가 무관심이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 5개 영토분쟁의 소지는 미국이 마련한 조약 최종 초안에 의도적으로 삽입된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일부로 조약 초안에 영토분쟁의 불씨

살려두었다.


당연히 이 영토분쟁은 강화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다.

소련(러시아), 남한, 중국 등이 그러하다.

5개 중 3개의 영토분쟁에 일본이 연관돼 있다.

5개 모두 샌프란시스코 협상 이후 수십 년 동안 매우 논쟁적인 현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영토분쟁의 일차적 원인은 국가적 자존심과 전략적 고려이다.

그러나 일부 영토분쟁은 최근 분쟁지역에서 해저 석유와 천연가스 등이 발견되면서 더욱 격화되고

있다.


가) 러일 영토분쟁(쿠릴열도/북방영토)


러시아와 일본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에 있는 4개의 섬을 두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는 이를 ‘남방 쿠릴열도’, 일본은 ‘북방영토’라고 부른다.

쟁점은 이 4개의 섬을 쿠릴의 일부로 볼 것인가, 아니면 홋카이도의 일부로 볼 것인가이다.

문제가 꼬인 것은 2차 대전 동안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이 전쟁이 끝난 후 1945~1947년 사이에

갑자기 적대국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945년 2월 소련 얄타에서 열린 미·영·소 정상의 3자 비밀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항복 이후

쿠릴 열도를 소련에 양도하는 데 합의했다.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영 앵글로색슨 국가의 미끼였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은 문제의 4개 섬을 포함해 쿠릴 열도를 장악했다.

그런데 냉전이 시작되고 샌프란시스코 협상이 시작될 즈음 미국은 입장을 바꾸었다.

문제의 4개 섬은 원래 일본 영토인데 소련이 군사력으로 점령했다는 것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따르면 일본은 “쿠릴 열도에 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돼있다.

그러나 쿠릴 열도가 소련에 속하는지, 그리고 문제의 섬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명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이) 냉전 전략에 따라 영토분쟁을 조장하고 오키나와를 분리해내 ‘2개의 일본’ 정책을

지한 결과는 5년 후 일·소 평화조약 교섭 과정에서 극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영토분쟁을 빌미로 일·소 평화협상을 파탄 낸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확정되기 직전, 미국과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은 쿠릴열도의 남쪽 두 개 섬

(시코탄, 하보마이)은 일본 영토로, 나머지 두 개 섬(에토로후, 쿠나시리)은 소련 영토로 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1956년 일·소 평화조약 교섭 당시에도 소련은 양국 간 영토분쟁의 해결방안으로 ‘두 개의 섬 반환’

해법을 제시했고,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 당시 일본 외교장관도 이 방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영토문제의 해결은 미국의 개입으로 좌절됐다.

덜레스 당시 미 국무장관은 시게미츠 장관에게 만일 일본이 쿠릴 열도의 일부라도 소련에 양보한다

면 미국은 “이와 마찬가지로 류큐(오키나와)에 대한 전면적 주권을 주장할 것”이라고 협박한 것이다.

결국 1956년 협상으로 일·소 간 국교는 회복됐지만, 평화조약은 맺지 못했다.


나) 한일 영토분쟁(독도/다케시마)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위한 미국의 초기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명기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인 1949년 12월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입장을 바꿨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경 미국의 초안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모두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애매하게 언급했으며, 일본의 영토 범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조약이 체결되기 한 달 전인 1951년 8월,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고 통보

했다.


조약이 발효되기 3개월 전인 1952년 1월 18일,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해상경계선(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수산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평화선을 선포한다면서 독도를 평화선 안에 포함시켰다.


1952년 5월 23일(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그리고 이에 따른 일본 주권 회복 약 한 달 후), 일본 외교부는

의회에 대해 독도를 주일 미군의 사격연습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통보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술책이었다.

오키나와의 B-29 미군 폭격기는 1948년부터 독도를 사격연습장으로 써왔다.


하지만 한국은 해안경비대 등을 동원해 미군기의 평화선 내 진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했지만 독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수산업협정을 통해 평화선을 제거했을 뿐이다.


다) 중일 영토분쟁(댜오위다오/센카쿠)


센카쿠 열도(尖角列島,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는 동중국해상 오키나와와 대만 사이에 위치한

개의 작은 무인도들이다.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간의 영토 분쟁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낳은 ‘2개의 일본’의 결과이자 19세기

말에 비롯된 ‘역사문제’의 유산이기도 하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이 처음으로 센카쿠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 주장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으로부터 대만을 할양받았다.

그러나 센카쿠는 전쟁의 전리품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무주선점(無主先占)의 원칙, 즉 발견 당시 주인이 없었으므로 먼저 발견한 일본이 소유권을 갖게

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센카쿠는 오키나와 현의 일부로 편입됐고,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미국은 센카쿠를 때때로 폭격연습장으로 활용했다.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 행정권을 일본에 반환하면서 센카쿠도 여기에 포함됐다.

당시 중국과 대만은 미국의 센카쿠 일본 반환에 대해 항의했다.


2012년 12월 말 베이징에서 발견된 중국어 문서를 검토해 보면, 만일 중국이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면 센카쿠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1950년 5월 15일에-6.25전쟁 직전, 여전히 중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상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을 때-작성된 10쪽의 이 문서에는 센카쿠가 중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표기돼 있

으며 영유권에 대해서도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


문서 중 한 부분에는 센카쿠가 류큐의 일부라는 분명한 표현이 있는가 하면, 다른 부분에서는 센카

쿠가 류큐보다는 대만 쪽에 가까이 있으므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이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일본과의 평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에는 1895년부터 2차 대전 종식 때

까지 일본이 획득한 모든 영토는 당초 영유권을 가진 국가들에 반환됐어야 했다.

위에 말한 1950년 중국어 문서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은 센카쿠가 류큐의 일부인지, 아니면 대만의

일부인지였다.


1970년대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회복할 당시 양측은 이 문제가 당장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

로 일단 접어두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1972년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는 일본의 한 정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댜오위다오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 양국 간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문제라

도 할 수 없다.”


1978년 양국이 평화조약을 맺을 때, 두 나라는 센카쿠 문제 해결은 뒤로 미루기로 구두로 합의했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른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일본 외교장관에게 댜오위다오 및

대륙붕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후에 차분히 논의해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 세대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가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78년 10월, 중국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도쿄의 성대한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같은 취지의 대답을 했다.

2012년 센카쿠를 둘러싼 양측의 군사적 대응을 보면 이러한 낙관이 잘못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라) 중·대만 영토갈등


5개의 영토분쟁 중 가장 심각한 것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전에 시작됐으나 분리된 평화, 즉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한 결과이기도 하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략을 막겠다며 제7함대를

만해협에 급파했다.

아시아 국가들 간의 주권 문제에 냉전 논리가 끼어든 극적인 사례이다.


이후 미국이 일본에 강요한 1952년 4월 28일의 일·대만 평화조약은 미국의 대만 사태 개입을 강화하는

빌미가 됐다.

중국의 입장에서 이는 중국 영토의 분단을 영구화하는 조치였다.

중국은 1895년 청일전쟁 패전 후 대만을 일본에 빼앗겼고, 이제는 미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 중국의 대만

수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1972년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베이징 정부를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따른 미·일 군사협력의 기본틀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미 국방부는 중국과 대만 간의 군사 갈등이 일어날 경우 무력 개입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

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중·대만 군사갈등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군 현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마) 중국과 동남아 국가 간의 영토분쟁(스프라틀리 군도와 파라셀 군도)


마지막 영토분쟁은 남중국해의 전략 지역에 드문드문 위치한 스프라틀리 및 파라셀 군도를 둘러싼 것으

로, 특히 1960년대 이 해역에서 해저 석유 및 가스자원이 발견되면서 분쟁이 첨예화되고 있다.

1940년대 후반 중국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는 차례로 이 섬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며 이에 대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은 반발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당시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일본은 스프라틀리

및 파라셀 군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중국의 영유권 주장은 의도적으로 배제됐으며 이 섬들이 어느 나라 소유인지도 특정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협상에 따른 영토분쟁의 역사에 관한 최고 권위자는 이러한 (조약상의) 불확실성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쐐기’라고 지적했다.

미래의 분쟁을 야기할 독소조항들을 심어 넣음으로써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봉쇄”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5492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정적 유산 중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지역 당사국 간의 영토분쟁이다.

다우어 교수에 따르면 이 영토분쟁은 “무관심이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일부로 영토 분쟁의 소지들을 조약 곳

곳에 심어 놓았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을 위한 미국의 초기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명기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인 1949년 12월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입장을 바꿨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경 미국의 초안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모두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애매하게 언급했으며, 일본의 영토 범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조약이 체결되기 한 달 전인 1951년 8월,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고 통보했다.


특히 1956년 일본과 소련이 문제의 북방 4개 섬을 각기 2개씩 나눠 갖는 방안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미국은 일본이 북방영토의 일부라도 소련에 양보한다면 오키나와를 미국령으로 만들 것이라고 위협

해 평화조약을 무산시킨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영토 분쟁은 지역 국가들의 원만한 화해를 가로막고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 지역을 지배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편집자>


http://cafe.daum.net/flyingdaese/Vfr0/2436?q=%EB%AF%B8%ED%95%99%EC%9E%90%20%22%EC%9D%BC%EB%B3%B8%EC%9D%B4%20%EA%B3%BC%EA%B1%B0%EC%9D%98%20%EC%A3%84%EB%A5%BC%EC%86%8D%EC%A3%84%20%EC%95%8A%EC%9D%80%20%EA%B2%83%EC%9D%B4%EC%84%B8%EA%B3%84%EA%B2%BD%EC%A0%9C%20%EC%9C%84%ED%98%9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