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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들’ 고종, 생일파티에 85억…억 소리나는 럭셔리 라이프

*바다향 2020. 9. 21. 07:43

우리가 몰랐던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모습이 공개된다.

9월 20일 방송되는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 56회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1대 황제 ‘고종’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역사 이야기를 펼친다.

우리에게 무능하고 유약한 왕으로 알려졌지만, 잘 몰랐던 고종의 모습들을 역사의 현장에서 배워가는 시간이

될 예정이다.

 

이날 설민석-전현무-김종민-유병재-문가영은 대한제국 선포 후 180도 달라진 고종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아내의 그늘에 눌려 살던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올라서며 본인의 정치를 펼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다고. ‘선녀들’을 놀라게 한, 고종의 가려졌던 정치 재능에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황권 강화를 위해 펼쳤던 고종의 억 소리 나는 럭셔리 생활은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고 한다.

고종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 석조전 건축에는 약 2,500억원의 돈이 사용됐다고 한다.

또 고종은 황실 품위유지비라는 명목 하에 자신의 생일 파티에도 약 85억원의 금액을 들이는 등 럭셔리 라이프를 즐겼다고.

모든 백성들이 힘겹게 살았던 그 당시. 고종은 이 엄청난 금액의 돈을 어떻게 쓸 수 있던 것일까.

그동안 가려졌던 고종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알아갈 배움 여행에 기대가 더해진다.

 

 

목차접기

  1.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결탁으로 왕위에 오르다
  2. 흥선대원군 집권의 명암, 개혁 정책과 쇄국 정책
  3. 민씨의 집권과 조선의 개항
  4.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갈등 속에 흔들리는 조선
  5. 점점 커지는 일본의 침략 야욕 속에 꺼져 가는 조선의 국운
  6. 대한제국의 자주를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비운의 왕
  7. 고종의 가계도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결탁으로 왕위에 오르다.

고종은 1852년(철종 3)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조대비(신정왕후 조씨, 익종의 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이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은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南延君)의 아들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는 동안 여러 왕실 종친이 화를 입는 상황에도 처신을 잘해 살아남았다.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안동 김씨 가문을 기웃거리면서 스스로 친 난 그림이나 팔려는 흥선군을 경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흥선군은 남몰래 정세를 살피며 조대비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풍양 조씨인 조대비는 흥선군과 결탁해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다.

이로써 60년간 이어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고종의 즉위와 함께 끝이 났다.

 

고종은 1866년(고종 3)에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민비(閔妃) 혹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과 민비 사이에서 4남 1녀가 태어났으나 27대 왕인 순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이 밖에 고종은 7명의 후궁에게서 3남 1녀를 두었다.

 

흥선대원군 집권의 명암, 개혁 정책과 쇄국 정책

 

고종의 즉위와 함께 조대비는 3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그 사이 조정의 실권은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갔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고 그동안 세도정치를 해 오던 외척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고 문란해진 국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내정 개혁을 실시했다.

 

고종

ⓒ 석지 채용신 | public domain

 

흥선대원군은 우선 부패한 유림의 온상이 되어 버린 서원을 철폐하고, 그동안 상민에게만 부과해 오던 군포(軍布)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했다.

이러한 과감한 개혁 정책은 그동안 양반들의 착취에 고통받던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이는 국가 재정 확충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채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중건했다.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은 국가와 왕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복궁 중건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

흥선대원군은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거두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했다.

초반에는 종친과 조선, 양반 들이 자발적으로 원납전을 내고, 부역에 참가하는 사람에게는 수고비를 지급하는 등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공사 현장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는 등 차질이 빚어졌다.

 

예상보다 공사 기간이 길어지자 점차 원납전과 부역 모두 강제성을 띠기 시작했다.

부족한 자재를 충당하느라 각 지방의 고목들이 잘려 나갔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거두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다.

당백전은 종래 사용하던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 액면가의 100배에 달하는 것이었으나 실질가치는 5~6배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고물가를 초래하고 화폐경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한편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는 동안 외세 침입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확산되었다.

특히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이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들과 청나라 사이의 갈등을 조정해 주고 그 대가로 연해주를 확보한 후 조선에 대해서 통상을 요구했다.

영국은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고자 골몰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의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대신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런 가운데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와 같은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서양인들에 대한 조선의 두려움과 거부감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러한 무력 도발의 원인을 조선 내부의 서양 지지 세력, 즉 천주교 신자들의 내응에 있다고 보고 그들을 더욱 박해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다소 줄었다가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는 심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 박해를 시작했는데,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되는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 의지를 더욱 굳혔다.

그리하여 1866년(고종 3)에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1872년(고종 9)까지 8천여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다.

 

또한 신미양요가 발생한 직후에는 전국적으로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주화(主和)는 매국(賣國)'이라는 기치 아래 흉흉한 민심을 하나로 모으려고 했다. 척화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 오랑캐가 침략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그러나 이러한 척화 정책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조선을 고립시키고 더욱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민씨의 집권과 조선의 개항

 

굳게 잠겨 있던 조선의 빗장은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풀리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하야에는 대표적 척사파인 최익현(崔益鉉)의 상소가 큰 역할을 했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에는 찬성했지만 서원 철폐 등의 내정 개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최익현은 1873년(고종 10)에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고 싶었던 고종은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임명해 힘을 실어 주었다.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을 품은 보수 양반층과 척족 세력들도 최익현을 지지하고 나섰다.

마침내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을 통렬히 비판하며 하야를 촉구하는 상소를 다시 한 번 올렸다.

이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10년의 세도를 마감하고 하야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실권으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척족 일가가 정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권력을 잡은 민씨 세력은 흥선대원군이 고수하던 쇄국 정책을 청산하고 개화 정책을 펼쳤다.

 

1875년(고종 12)에 일어난 운요호(雲陽號) 사건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런 가운데 민씨 정권은 1876년(고종 13)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문호를 개방했다.

 

그런데 총 12개조로 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이 조선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에서 고종과 민씨 정권의 외교적 미숙이 드러난다.

 

강화도 조약으로 우려했던 개화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보수 유림층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이 그것이다.

 

흥선대원군의 하야 직후 상소의 내용이 지나치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쫓겨났던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상경해 궁궐 앞에 엎드려 개화 반대 상소를 올렸다.

 

1880년(고종 17)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조선책략(朝鮮策略)》은 위정척사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조선책략》은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의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이 쓴 책으로, 러시아의 남침을 막기 위해 조선이 "중국과 친밀하게 하고, 일본과 손을 잡으며,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親中國 結日本 聯美國)."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민씨 정권은 이것이 앞으로 조선의 외교 문제를 풀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이 내용을 널리 알리도록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전국의 보수적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그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하고 책을 가져온 김홍집의 처단을 요구했다.

위정척사 운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척사파들은 서양 세력을 무조건 배척하기만 할 뿐 조선의 올바른 외교 정책에 대한 대안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갈등 속에 흔들리는 조선

 

1882년(고종 19)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민씨 정권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임오군란은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인들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으로, 1년이 넘게 받지 못했던 급료를 지급받는 과정에서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그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를 비롯한 민씨 척족들과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

여기에는 민씨 척족들이 권력을 독점해 자행한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과 강화도 조약 이후 드러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한 적개심이 작용했다.

 

그 와중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민비는 몰래 궁을 빠져나가 장호원으로 피란했다.

그 사이 군민들의 지지를 받은 대원군이 복귀했다.

고종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다.

대원군은 민비의 행방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왕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장례까지 치르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민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충청도에 피신해 있었다.

 

민비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정권을 되찾기 위해 몰래 청나라와 접촉해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결국 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해 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사이 민비는 환궁해 다시 권력을 잡았다.

대원군과 민비의 갈등에 외세까지 개입된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인 흥선대원군과 민비는 왜 이리 사이가 벌어진 것일까?

흥선대원군은 외척의 득세를 경계해 일부러 별 볼일 없는 가문의 규수인 민비를 왕비로 들였다.

그러나 민비는 정치적 야심이 많은 여장부였다.

그는 가까운 민씨 척족들을 정계에 진출시키며 호시탐탐 정권을 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낌새를 눈치 챈 대원군은 민비가 낳은 첫째 아들이 일찍 죽자 고종의 후궁이 낳은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고 했다. 이 일로 대원군과 민비의 사이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은 결국 권력에 대한 야욕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어쨌든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민비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청나라는 점차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일본은 이에 질세라 임오군란 당시 공사관이 습격으로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는 핑계로 조선 조정에 무리한 요구를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평등 조약인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다.

 

이처럼 조선이 점점 한심한 지경에 이르는 사이 젊은 개화파들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고 있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2년 뒤인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이 무력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일본 공사가 이들을 뒤에서 지원했다.

이날 밤 우정국(郵政局)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總辦) 홍영식이 주관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閔泳翊)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했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는데, 밖에서 여러 명의 흉도(凶徒)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에 이르러 변고에 대해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移御)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했다. 상이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 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했다. - 《고종실록》 권 21, 고종 21년 10월 17일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은 곧바로 새 내각을 세우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이 즉각 개입함에 따라 이들은 사흘 만에 퇴각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삼일천하'였다.

정변의 주역들은 청군에 의해 피살되거나 겨우 도망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렇게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민간에서는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고 있었다.

동학은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서학(西學)이라 불리던 천주교가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토속신앙이다.

동학은 교조인 최제우가 1864년(고종 1)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된 후에도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에 의해 꾸준히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1892년(고종 29)부터는 교조 신원 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집회를 중심으로 가난과 수탈에 지친 농민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4년(고종 31)에는 마침내 전봉준(全琫準)을 필두로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동학혁명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농민봉기는 반봉건, 반침략 투쟁의 기치 아래 맹렬한 기세로 퍼져 나갔다.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걸고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자 고종과 민씨 정권은 청군의 개입을 요청했고, 이것이 일본의 파병을 불러왔다.

톈진 조약에 의해 청·일 양국 중 한 나라가 군대를 파견하면 다른 한 나라도 자동적으로 군대를 파견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의 안방까지 치고 들어와 대치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곧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점점 커지는 일본의 침략 야욕 속에 꺼져 가는 조선의 국운

 

청일전쟁은 일본에 점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의 내정 간섭도 더욱 심해졌다.

 

그런 가운데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갑오개혁은 1894년(고종 31)부터 1896년(고종 33)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로써 수많은 조선의 전근대적 제도들이 근대적 제도로 전환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일대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사전 정치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회한(悔恨)이 남는다.

 

더구나 일본은 갑오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895년(고종 32) 10월 8일에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일국의 왕비인 민비를 시해했다.

 

이 극악무도한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이 일과의 관련성을 부정했지만 결국 이 사건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사주와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지휘로 이루어진 일임이 밝혀졌다.

이 일을 계기로 그해 을미의병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폭도들에게 왕비를 잃은 고종 역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새롭게 들어선 친러파 내각은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사시켰다.

청나라, 일본으로도 모자라 러시아까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조선 왕실은 존립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래도 고종은 왕권 강화와 국가 수호의 의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환궁한 직후 새롭게 구성한 측근 중심의 내각과 함께 1897년(고종 34)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이로써 500여 년을 이어 온 조선은 그 국호를 버리고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의 운명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한반도에 대한 패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였고, 그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것은 대한제국의 자주 주권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대한제국의 자주를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비운의 왕

 

고종은 1907년 7월,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다.

고종의 퇴위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었다.

 

고종은 1907년 4월 20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의 밀사를 파견해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이 비밀외교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고종도 일본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고종은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倂呑) 이후인 1919년 1월 21일에 덕수궁에서 68세의 나이로 죽었다.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러한 분노는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울분 속에서 죽어 간 것이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 속에서, 친정을 시작한 후로는 민씨 척족의 전횡 속에서 자신의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고종.

그는 세계 열강들의 이권 다툼의 와중에서 조선의 주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 행위를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 등 조선의 자주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고종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홍릉(洪陵)이다.

 

고종의 가계도

제26대 고종(高宗, 1852∼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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