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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잇는 다리] 누각다리①, 곡성 태안사 능파각

*바다향 2020. 9. 2. 13:23

▲구례 천은사 수홍루 빼어난 풍광에 잘 어우러지는 누각다리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앙 무지개를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었다. 양쪽 돌로 쌓은 벽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인기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곳으로, 단풍이 고운 가을은 물론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 이영천.

 

구례 천은사에 있는 수홍루는 인기드라마(<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유명해진 다리다.

드라마 이야기처럼 어느 계절에 찾아도 빼어난 자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무지개를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었다.

오래된 석축에 잇대어, 아치형 거푸집에 철근으로 뼈대를 엮고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만든 다리다.

바로 옆에 막돌로 쌓은 이끼 낀 오래된 돌 벽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은 어쩔 수 없다.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전주천 남천교는 길이 82.5m에 폭 25m(도로 16m, 보도 및 청연루 9m)로 한옥마을과 동서학동을 잇는다.

3경간 타원형 아치교로, 다리 위 보행로엔 누구나 즐기고 이용할 수 있는 누각 청연루를 얹었다.

2×9칸 팔작지붕 한옥으로 시민과 관광객들의 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타원형 아치는 경간이 길어 돌을 쌓아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형식이다.

강재나 철근콘크리트로 가능한 아치로, 남천교도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었다.

겉엔 장식용 돌을 붙여 돌 무지개를 흉내냈다.

뛰어난 풍광과 높은 이용률, 기능성 충족에도 불구하고 무척 아쉬운 지점이다.

비용이 좀 들더라도, '오홍교'라는 옛 이름에 걸 맞는 5경간 무지개다리로 복원할 수는 없었을까?

 

보성강 따라 태안사로 가는 길

 

▲능파각 전경 누각다리 아래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힘차다. 가운데 칸에 한자로 '능파각'이란 현판이 보이는 수수한 모습 맞배지붕 누각이다. 일주문을 지나 태안사로 드는 작은 계곡을 건너는 곳에 위치한다. 산문-월천-해탈로 이어지는 길의 중지점에 능파각이 있다.

ⓒ 이영천

 

'아름다운 미인의 가볍고 우아하며 맵시 있는 걸음걸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능파(凌波)라는 이름의 해석이다.

능파는 아름답게 출렁이는 물결마저도 얕잡아 본다는 뜻일까?

그래서 곡성 태안사로 가는 길은 마냥 설레기만 한다.

능파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보성강 풍광은 평화롭기만 하다.

보성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보통 역수(逆水)라 하여 경계하는 물길이다.

역으로 흐르는 강의 마음이 문득 궁금해진다.

이곳 사람들도 그 마음을 닮아 있는 것일까?

 

옛 권력자들은 이런 물줄기를 역린(逆鱗, 임금의 노여움을 이르는 말.

용의 턱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하여 건드린 사람을 죽인다고 하는 <한비자> '세난편(說難編)'에서 유래한 말)으로 보았다던가?

내 눈엔 세상에 둘도 없는 맑고 고운, 사랑스런 물길일 뿐이다.

 

▲주암호로 흘러드는 보성강 남에서 북으로 흘러 흔히 역수(逆水)라 부르는 보성강은 곡성 오곡면 압록리에서 섬진강과 합류한다. 강변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 이영천

 

보성강에서 길을 꺾어 동계리로 접어든다. 곡성군 죽곡면이다.

보성강으로 흘러드는 동계천 힘줄기가 제법 굵다.

태안사를 서측 산 허리에 안고 있는 봉두산과 주변 산들이 깊은 계곡을 파냈다.

그 길로 사시사철 맑고 깨끗한 물을 흘려보내 준다.

동계천의 굵음은 깊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깊은 곳에서 흐른 물은 달달한 젖이다.

그 젖을 먹고 나무며 풀이며, 짐승들이 살아간다.

사람의 삶도 거기에 기대어 있다.

 

2차선 한적한 지방도로가 동계마을을 지나자, 태안사로 드는 입구가 기다린다.

원달마을 좀 못 미친 곳이다.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더 상쾌하다.

마음 속 깊이 고여 있는 찌꺼기를 씻어내 주는 느낌이다.

산문(山門)에 드는 것은 항상 이런 기분이다.

 

늘 뜬 눈으로 살다간 시인 조태일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태안사로 드는 계곡 초입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식칼론', '국토' 등 유려한 서사시를 남겼다. 큰 체격에 수줍은 미소가 일품이었던 시인은, 역사의 무게와 인간정신의 위기로 부터 한번도 비켜가지 않았다 말한다. 늘 뜬 눈으로 세상을 살다 갔다.

ⓒ 이영천

 

태안사로 오르는 길은 호젓한 운치가 있다.

키 큰 나무들이 문인석처럼 도열하고, 그 옆으로는 맑은 냇물이 흐른다.

얼마 가지 않아, 조태일(趙泰一, 1941∼1999. 전남 곡성 출생.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아침선박'으로 등단.

시집으로 <아침선박>(1965),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속에서

꽃 속에서>(1991) 등이 있음) 시문학관이 먼저 반긴다.

 

산사에 오르는 길에 시문학관이라니.

아니다. 능파각도 물론이지만, 사실은 시인의 시가 그리워 찾아 나선 길이다.

태안사 가는 길에 시인을 찾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시인은 태안사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8살 때 여순사건을 겪는다.

후퇴하는 반란군과 진압하는 간도특설대가 벌인 전투에 피해를 입었으리라.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태안사다.

반란군의 뒤를 쫒아온 간도특설대는, 곡성과 구례에서도 갖은 악행을 저질렀을 개연성이 높다.

 

시인은 그 악행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 것이다.

역사의 비극은 한 개인과 그 가정을 한 발짝도 비켜가지 않는다.

시인의 가족은 이 일을 겪고 광주로 이주하고 만다.

 

시인 아버지는 승려였다. 이곳 태안사 대처승이다.

혈육의 정이 오죽 간절했을까?

하지만 평생 대처승 아버지를 입 밖에 내어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돌아가신 어머니 용돈을 매달 얼마씩 5년간이나 통장에 입금할 만큼, 애절함이 깊었다.

시인의 깊은 외로움이 태안사 깊은 계곡에 잇닿아 보인다.

 

시인은 끼니가 술이었다.

소주에 밥 말아 먹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술로 건강이 망가진다.

하지만 술에 취하지 않은 '날카롭게 뜬 눈'으로 세상을 살다 갔다.

세상 모든 것이 번뇌였으리라.

하지만 시인은 단 한 번도 현실을 빗겨가지 않는다.

오히려 날카로운 식칼을 꺼내든다.

식칼로 세상을 베고,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칼을 씻어 그 시퍼런 칼날을 벼리며, 죽어도 감을 수 없는 '늘 뜬 눈'으로 아직도 버젓이 살아있다.

 

썩은 세상과 거짓과 위선,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인간정신의 위기로부터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만족을 구하고 방종하게 살아가지도 않았다 한다. 술이 벗이다.

시인은 또한 자기 시가 태안사에서 발원했다 말한다.

 

이곳에서 출발해 온 국토를 내달려, 민족과 역사 앞에 올바르게 서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늘 뜬 눈의 식칼이건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밟아야 하는 우리 국토건 간에, 이것은 모두를 위한 '삶의 공통된 수단'이 되어야 한다.

서로를 위해 같이 부여안고 품어내는 무기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1969년에 월간지 <시인>을 창간한다.

여기를 통해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등 쟁쟁한 시인을 발굴한다.

1974년엔 압제의 현실에 저항하고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단에 많은 문인들과 함께한다.

 

여러 번의 필화와 투옥을 경험한다.

1988년엔 협의회를 해체하고 창립한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상임이사를 맡기도 한다.

태안사로 접어드는 산길에서 시인의 몸부림이 느껴진다.

휘휘 불어오는 바람소리,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시인의 외침이 숨어 있다.

늘 뜬 눈의 식칼이 이 산하 곳곳에서 번뜩이고 있다.

 

단아한 여인의 수수하고 맵시 있는 걸음걸이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전경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은 시인의 작품과 관련자료를 전시하는 공간, 시인이 생전에 글을 쓰던 작업실 등을 재현하고 있다. 한쪽엔 작은 북카페를 두어 방문자들 휴식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 이영천

 

태안사를 향해 길을 오를수록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졸졸 흐르는 물소리뿐이다.

결혼하기 전, 몇 번 만나지 않은 지금의 아내와 이곳을 찾는다.

초가을 좀 무더운 날로 기억한다.

서로 속마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조용히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감정이나 느낌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이 길을 걸으면서, 운명처럼 이 여자와 결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안사 좀 못 미친 능파각 앞에서다.

시원한 바람이 사방에서 우릴 에워싸는 기분이다. 맑고 시원한 느낌이 밀려든다.

눈앞이 환하게 밝아 옴을 느꼈다.

시문학관을 지키고 계신 부부도 이곳 능파각에서 연을 이었노라 말한다.

 

▲능파각 측면 전경 월천(越川)하는 공덕을 쌓는 능파각 모습이 수수하다. 1×3칸 맞배지붕 누각 모습이 정연하다. 교대역할을 하는 석축에 걸린 귀틀목과 하인방이 뚜렷하고, 합각에 걸린 붉은 풍판이 보인다. 주변 숲과 어울린 모습이 수수한 멋쟁이를 연상시킨다.

ⓒ 이영천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는 자리다.

바위가 밖으로 노출된 계곡 양편에 튼튼한 석축을 쌓았다.

이를 다리를 지탱할 교대로 삼았다.

석축에 계곡을 가로질러 보 역할을 하는 굵은 통나무 귀틀목 세 개를 걸었다.

귀틀목 위에 주초(주춧돌) 역할을 하는 하인방(下引防, 한옥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는 가로재.

상인방, 중인방, 하인방으로 구분함)을 튼실하게 결구시킨다.

여기에 기둥을 세워 정면 한 칸, 측면 세 칸의 누각을 세웠다.

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만들어, 고려 태조 24년(941년)과 조선 영조 43년(1767년)에 고쳤다 전한다.

 

능파각 구조 귀틀목과 하인방, 그 위에 결구된 주초와 기둥이 선명하다. 천장은 푸른색 계열의 단청으로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주심포계 공포로 정갈한 멋을 부렸다.

ⓒ 이영천

 

주심포계(기둥머리 위에만 여러 공포를 짜 넣어 장식한 목조건축기법)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로 수수한 멋만 부렸다.

정면에 붉은색 풍판(風板, 맞배집 두 쪽 박공 밑에 나무 널빤지를 길이로 달아 매, 비바람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나무판)을 단 5량(도리가 5개가 걸린 한옥.

집의 넓이에 따라 3량, 5량, 7량, 9량 등 홀수로 구분) 맞배지붕이다.

상판은 2열 우물마루다.

 

다리 위로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처마를 길게 늘여 빼고, 부연(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

처마 끝을 위로 들어 올려 모양이 나게 함)으로 겹처마를 덧대어 넓은 지붕 폭을 확보했다.

귀틀목과 하인방, 상판 우물마루가 비바람에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대들보 위에 널판으로 만든 대공(들보 위에 세워서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을 세워, 중(中)도리까지 이어 장방형 우물천장을 만들었다.

능파각 측면의 가운데 칸 우물천장엔 아래를 바라다보는, 몸통을 비죽이 내밀고 있는 용머리를 돌출시켰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하얀색 긴 수염을 달고 능파각을 지나는 중생을 굽어본다.

무지개다리 궁륭에 돌출된 용과 같이 수해(水害)를 방비하고 산사에 드는 중생을 계도하는 의미다.

능파각 누각다리는 전체적으로 붉은색이다. 안쪽 천장 푸른 단청이 맑고 밝아서 무척 이채롭다.

 

능파각이 계곡을 건넌다.

단아한 여인이 수수하면서도 맑은 치장을 했다.

계곡 사이를 단정하고 차분하며 맵시 있게 건너고 있다.

주변의 나무들도 호응한다.

바람과 새, 물과 나무, 바위까지도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들이 따뜻하다.

월천(越川)하는 아름다운 공덕(功德)이다.

세속의 번뇌를 버리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현시한 관음보살을 따라 불국토에 들어서는 걸음이다.

 

산문(금강문)에 들어(入山) 계곡을 건너며(越川), 용의 꾸짖음을 받아 번잡한 속세를 잊는 해탈(解脫)하는 길이다.

이 모든 게 단한번의 건넘으로 이뤄진단 말인가?

능파각의 아름다운 걸음이, 시인이 걸었을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는 그 길'로 자꾸만 이끌고 간다.